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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Oct 09. 2021

그림을 처음 걸던 날

그 뜨거웠던 온도의 기억


2014년, 충무로의 어느 작은 갤러리의 단체전에 그림을 처음 걸었던 날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학부 3학년이었고,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작가가 되기를 꿈꾸는 여느 미대생들처럼 매일 스스로를 시험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단체전은 페이스북의 어느 예술 관련 그룹 내에서 작가 몇몇을 뽑아 전시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선정이 되었고, 100호 그림 한 점을 걸 기회를 얻었다. 학교를 벗어나 학교 이외의 공간에 내 그림을 거는 일을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고 설렜다. 학교 안에서는 학우들이나 교수님들이 내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고 멋대로 생각했던 차에 이렇게 외부에서 선정까지 되어 전시씩이나 하게 되니 그야말로 자존감 이라는것이 대폭발했다. 지금이야 여러 작가가 다수 참여하는 단체전에 그림을 한 두 점 출품하는 일은 내게 너무 흔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 그 반지하의 작은 갤러리에 내 그림을 걸고, 사람들이 나를 '작가님'이라는, 너무나 어색하지만 우쭐한 기분을 들게 하는 그 호칭이 주는 쾌감이란.


어쩐지 그림을 걸자마자 내 작품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예술의 구원자가 나타나, 예술 작품이 세상에 던지는 위안에 대한 찬사를 논하며 나의 작품을 흔쾌히 구매하고 앞으로의 행보를 주시하겠다는 멋지고 쿨한 멘트를 던질것만 같은 착각에 나는 진심으로 빠져들었다. 길지 않았던 전시 기간 동안 다녀간 이들은 적지 않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기적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의 첫 외부 전시를 축하하러 온 선후배들과 친구들이 잔뜩 주고 간 시들어가는 꽃다발, 산더미 같은 롤케익, 스타벅스 쿠폰만이 전시를 증명하는 흔적으로 남았다. 


2014년, 다니던 대학 실기실에서



나는 당시 전시를 했던 갤러리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동국대에 다니고 있었는데, 고작 한 정거장 거리 때문에 그림을 옮길 용달 차량을 쓸 돈이 아까워 내 키만한 그 큰 그림을 직접 이고 지고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충무로의 골목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모습 그대로 학교 실기실로 돌아오는 길의 기분은 사뭇 다르기는 했지만.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일이 직업이 된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직업인으로서의 화가인 나에게는 여전히 나의 그림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이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언제나 설레면서도 두렵다. 오랜 작업 시간 동안 오롯이 나 혼자만이 마주했던 그림들을 텅 빈 전시장에 그림을 거는 순간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어딘가에서 나의 그림을 마주칠 때는 빈틈없이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든다. 사회적 통념상 예술가라는 직업은 어느 정도 자아도취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로 그려지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 되기엔 이미 틀린것 같다. 생각을 정제하고, 세상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동안, 그 과정이 펼쳐지는 캔버스 안에서 나는 매 순간 날것의 나와 마주한다. 어쩌면 이 또한 다른 방식의 자아도취 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처음 걸던 그 날의 미숙했던 예술가가 느꼈던 그 최초의 쾌감과 착각의 온도를 적절히 유지하는 방법을 나도 모르는 새 스스로 능숙하게 익히게 된 것일수도 있다. 

그때에 비하면 마치 보일러의 자동 온도 조절기마냥 도취와 좌절을 적절히 구분짓게 된 내게, 그 기억은 끓는 점을 아득히 넘었던 뜨거운 온도로 여전히 내게 잔열을 전한다.



당시 첫 단체전에 걸었던 작품 - 우리 (we), 161.5x129.5, oil on canvas,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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