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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프랑스

by Dodoseeker

자다가 새벽에 두세 번은 깬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도 소포를 잃어버렸고, 결국 영영 찾지 못하는 꿈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깰 때마다 비몽사몽 하며 송장번호를 크로노포스트에 입력했고, 거기에는 여전히 배송 예정이라는 글씨가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습니다. 제대로 발음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아마도 '배송 예정'이라는 프랑스어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침이 되어 메일 알람이 왔고, 프랑스어로 된 그 문장을 번역해 보니 한국으로 반송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습니다. 어제 배송을 한다더니, 어제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이제는 아무 이유 없이 한국으로 돌려보낸다니 아주 기가 찰 노릇이었지요.


이른 시간이었지만 프랑스어가 가능한 M에게 급히 연락을 해 전화를 부탁했습니다. 반송이 되기로 했다면, 잠깐만 소포를 어디 맡아 달라고, 오늘 내가 직접 찾으러 가겠다는 이야기를 전해달라고요. 그 전화가 오가는 몇 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습니다.


잠시 후 제게 전화를 건 M은 침통한 목소리로 비보를 전해주었습니다. 이미 어제 월요일에 반송이 시작되었다고, 그래서 소포를 찾으러 갈 수 없으며,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소포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다고요.


소식을 듣고 잠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오히려 단단히 체했던 무언가가 쑥 내려가는 상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원했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번민하던 일이 이렇게 단번에 해결되었다는 사실이, 이제 이 고민을 끝내고 비로소 다른 방향으로의 답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유쾌하게 느껴졌습니다.

괴로움을 끝내기 위한 괴로움은 충분했고, 덕분에 프랑스의 우편 시스템을 마음껏 험담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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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지하철을 타고 파리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화방을 찾아가 시험 삼아 둘러보았습니다. 눈에 띄는 재료와 도구들은 그동안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것들과 다소 다르고 낯설었지만, 오히려 새로 이사할 집에 들여놓을 새 가구들을 고르는 기분이 되어 마음이 가뿐했습니다. 새 집에 들어갈 중고는 저 하나로 충분하니까요.


이제 원래 사용하려던 재료와 도구들을 전혀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니, 앞으로 프랑스에서의 작업들은 정말 프랑스에서 구한 원료(?)들로만 이루어진, 순도 백 퍼센트의 'MADE IN FRANCE'가 되겠네요. 이제야 비로소 프랑스에서의 진짜 여정이 시작 된 것 같습니다. :)



KakaoTalk_20220329_213353840_01.jpg 프랑스판 호미화방 <Rougier & 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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