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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Apr 03. 2022

파리를 잃고, 읽어가는 시간

우리는 심플해진다.



만우절 아침에는 시떼 레지던시 리셉션 직원 프레드가 뜬금없이 왓츠앱으로 제 소포가 도착했고, 제가 미리 맡겨 둔 돈으로 관세를 치렀다고 알려왔습니다. 나는 그거 너무 다행이라고, 받아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타이핑 했지만, 몇 초 뒤 프레드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미안하다며 그 소포는 네 것이 아니라, 다른 한국 작가의 것이었다면서, 돈을 다시 돌려주겠다는 텍스트를 순식간에 보내왔습니다. 

그 잠시의 착오 속에서 설렘과 안도와 즐거움을 느끼는 동시에, 소포가 한국으로 반송 되어 오히려 후련한 마음으로 완벽한 '메이드 인 프랑스'인 작업들을 할 수 있다며 세상에서 가장 쿨한 척을 했던 내가 부정되는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덕분에 예정대로 쿨한 척을 하며 쿨한 작업을 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프레드, 맡겨놓은 내 돈은 월요일에 꼭 받으러 갈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양을 쫓는 모험>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조금씩 심플해지고 있다. 나는 살아온 거리를 잃고, 십대를 잃고, 친구를 잃고, 아내를 잃고, 앞으로 삼 개월 후면 이십대를 잃으려 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파리에 처음 도착해서 십이 일을 머물렀던 16구의 정든 하녀방을 떠나 삼 개월을 머무르게 될 낯선 장소로 또 다시 거처를 옮깁니다. 하루키의 문장처럼 우리는 분명 심플해져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루키의 문학세계에서 이야기 하는 '잃다'라는 의미는 '읽다'로 받아들여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잠시 살았던 거리와 집과, 창문을 열면 보이는 지붕과 굴뚝이 가득한 풍경이 담긴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아쉬움을 담아 책의 커버를 닫고, 그 다음에 내게 건네진 낯선 책의 표지를 열어 읽어볼 차례가 온 겁니다. 어떤 책은, 끝까지 다 읽는다는 것을 상상도 못할 정도로 끔찍하게 지루하기도 하지만, 어떤 책은 마지막 장을 넘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쉬운 마음에 몇 번씩 문장들을 곱씹어보고, 필사하며 그 순간들을 붙들어보려 애쓰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에서 '읽어가는' 시간들은 그렇게 나의 시간 속에서 스테디셀러가 될 거라는, 명징한 확신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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