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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보레무스 Laboremus

시떼 국제 예술가 레지던시에 입주하던 날의 기록

by Dodosee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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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도착하고 11일째, 시떼 레지던시에 입주했습니다.

미리 파리에 도착한 덕분에 도시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익혔고, 대중교통을 타는 방법도 숙지하게 된 데다가, 소포 문제로 한 번 시떼에 다녀간 경험이 있었기에 머물렀던 숙소의 짐을 정리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발해 점심이 되기 전에 생 폴 역 인근의 시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소포가 한국으로 반송된 사건을 겪고 나선지, 어쩐지 시떼에 도착하는 순간 레지던시의 직원이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며 내가 머물게 될 일 자체가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 또 다른 해프닝이 일어나는 끔찍한 상상을 했습니다만, 오래간만에 만난 리셉션의 프레드는 반가운 목소리로 "오늘 입주하는 날이지?" 하며 내 짐에 대한 소식을 물어봐 주었고, 나는 그에게 내 소포는 나보다 한 발 먼저 한국으로 일찍 귀국해 버렸다는 안부를 전해주었습니다. 프레드는 두 손을 벌리며 허탈한 웃음을 짓고는 시떼의 여러 시설과 규칙, 내가 입주할 방에 대한 안내를 차근차근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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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시 건물은 코인 세탁실을 포함해 리허설 룸, 다양한 연습이나 작업이 가능한 공용 공간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제가 배정받은 방은 1433호였습니다. 방 숫자를 언뜻 들었을 때, 몇 층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고, 관리인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도착해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까지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으나, 세 달 간 치열한 시간을 보내게 될 운명적인 공간과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어떤 작업을 시도하고, 만들어가게 될 지에 대한 고민과 설렘에 방 번호의 숫자에 대한 배열 체계 따위의 사소한 의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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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봄과 초여름을 보내게 될 나의 공간은 널찍한 원룸에, 방에서 입구를 바라본 방향으로 출입문 바로 좌우에 작은 창고와 아담한 주방이 각각 있고, 안쪽 우측으로는 작은 1인용 침대와 그 옆에 화장실이 붙어있는 구조입니다.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방 좌측 면은 콘크리트 벽 전체에 나무 패널이 붙어 있어, 종이나 천 따위의 다양한 매체를 고정시켜놓고 작업이 가능하도록 꾸며져 있었고, 그 앞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손때가 묻었을 이젤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출입문과 마주 보는 방의 북쪽 면에는 큰 창문이 있었는데, 시야에 바로 마주 보는 건물이 있어 아마도 활동을 하는 낮 시간 이외에는 커튼을 치게 될 것 같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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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대충 풀어놓고는 바로 화방으로 달려가 당장 내일부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생활을 위한 여러 잡다한 물건들도 함께 구입하느라 시떼 근처의 슈퍼마켓과 생활용품점에 두세 번 오가기도 했고요.

밤에는 시떼에서의 첫 날을 자축하기 위해 홀로 샴페인을 열었습니다. 한 잔을 채 다 마시기도 전에 귀까지 빨갛게 변했지만, 지금까지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내어 이곳까지 스스로를 인도한 나 자신에게 건배와 격려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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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은사님께서는 젊은 날 이곳에서 작가로서의 주춧돌을 놓으셨던 장소였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제게 있어 이곳에서의 짧고도 긴 시간은 미래의 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될까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라보레무스"(Laboremus), '자, 일을 계속 하자.'라고 외쳤던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늘 그래 왔듯, 나의 일은 언제까지고 나 자신을 가장 나다운 존재로 살아가게 해주는 일임을 확신하는 시간으로 채워 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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