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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Apr 05. 2022

라보레무스 Laboremus

시떼 국제 예술가 레지던시에 입주하던 날의 기록



파리에 도착하고 11일째, 시떼 레지던시에 입주했습니다. 

미리 파리에 도착한 덕분에 도시의 분위기도 어느 정도 익혔고, 대중교통을 타는 방법도 숙지하게 된 데다가, 소포 문제로 한 번 시떼에 다녀간 경험이 있었기에 머물렀던 숙소의 짐을 정리하고 지하철을 타고 출발해 점심이 되기 전에 생 폴 역 인근의 시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소포가 한국으로 반송된 사건을 겪고 나선지, 어쩐지 시떼에 도착하는 순간 레지던시의 직원이 무언가 착오가 있었다며 내가 머물게 될 일 자체가 없던 일이 되어 버리는.... 또 다른 해프닝이 일어나는 끔찍한 상상을 했습니다만, 오래간만에 만난 리셉션의 프레드는 반가운 목소리로 "오늘 입주하는 날이지?" 하며 내 짐에 대한 소식을 물어봐 주었고, 나는 그에게 내 소포는 나보다 한 발 먼저 한국으로 일찍 귀국해 버렸다는 안부를 전해주었습니다. 프레드는 두 손을 벌리며 허탈한 웃음을 짓고는 시떼의 여러 시설과 규칙, 내가 입주할 방에 대한 안내를 차근차근해 주었습니다. 







레지던시 건물은 코인 세탁실을 포함해 리허설 룸, 다양한 연습이나 작업이 가능한 공용 공간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고, 제가 배정받은 방은 1433호였습니다. 방 숫자를 언뜻 들었을 때, 몇 층인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고, 관리인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도착해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까지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으나, 세 달 간 치열한 시간을 보내게 될 운명적인 공간과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어떤 작업을 시도하고, 만들어가게 될 지에 대한 고민과 설렘에 방 번호의 숫자에 대한 배열 체계 따위의 사소한 의문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다가오는 봄과 초여름을 보내게 될 나의 공간은 널찍한 원룸에, 방에서 입구를 바라본 방향으로 출입문 바로 좌우에 작은 창고와 아담한 주방이 각각 있고, 안쪽 우측으로는 작은 1인용 침대와 그 옆에 화장실이 붙어있는 구조입니다. 잠을 자는 시간 이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방 좌측 면은 콘크리트 벽 전체에 나무 패널이 붙어 있어, 종이나 천 따위의 다양한 매체를 고정시켜놓고 작업이 가능하도록 꾸며져 있었고, 그 앞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의 손때가 묻었을 이젤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출입문과 마주 보는 방의 북쪽 면에는 큰 창문이 있었는데, 시야에 바로 마주 보는 건물이 있어 아마도 활동을 하는 낮 시간 이외에는 커튼을 치게 될 것 같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짐을 대충 풀어놓고는 바로 화방으로 달려가 당장 내일부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습니다. 물론 앞으로의 생활을 위한 여러 잡다한 물건들도 함께 구입하느라 시떼 근처의 슈퍼마켓과 생활용품점에 두세 번 오가기도 했고요. 

밤에는 시떼에서의 첫 날을 자축하기 위해 홀로 샴페인을 열었습니다. 한 잔을 채 다 마시기도 전에 귀까지 빨갛게 변했지만, 지금까지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아내어 이곳까지 스스로를 인도한 나 자신에게 건배와 격려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대학 시절 은사님께서는 젊은 날 이곳에서 작가로서의 주춧돌을 놓으셨던 장소였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니다. 제게 있어 이곳에서의 짧고도 긴 시간은 미래의 저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될까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라보레무스"(Laboremus), '자, 일을 계속 하자.'라고 외쳤던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늘 그래 왔듯, 나의 일은 언제까지고 나 자신을 가장 나다운 존재로 살아가게 해주는 일임을 확신하는 시간으로 채워 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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