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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Apr 07. 2022

시떼에서의 셋째 날

실패를 연습하기 




시떼에서 맞는 세 번째 날, 작업실의 한쪽을 작업공간 삼아 화방에서 사 온 롤지를 벽에 붙여놓고 파리에서의 첫 번째 작업을 개시했고, 정상적인(?) 재료 이외에도 파리에서 머물렀던 2주 남짓 되었던 시간 동안 버리지 않고 모아 놓았던 상품 포장지나 영수증, 엽서들 위에도 생각과 마음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풀어놓는 연습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떠나온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면 특별할 사연을 갖지 못했을 평범하고 사소한 물건들은 이방인인 나에게 있어 이곳에서의 여정을 증명하는 날것의 흔적이기에, 여기에서 탄생한 상상력을 그 흔적들 위에 덧씌우는 일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한 일들을 해 보려 합니다. 평소에 해 왔던 작업 방식을 이곳에서조차 그대로 고수하고 답습한다면, 내게 주어진 이 소중한 기회와 시간들을 기만하게 되겠죠.







익숙했던 습관과 방법을 외면하고 다른 방식을 찾는 일은 분명히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실패들을 '발견'하는 일이야 말로 이곳에서의 가장 멋진 일이 될 것입니다. 이곳을 떠날 때 얻게 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완결된 무언가가 아닌, 수많은 크고 작은 실패가 만들어낸 미완의 무언가 이길 간절히 바랍니다. 언제까지고 미완으로 머물되, 완결된 무언가를 열망하는 몸과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서울에서 평소에 작업하던 습관대로 오전 5시에 작업실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고, 오후 10시에 잠이 드는 루틴을 여기에서도 성실하게 수행할 생각은 처음부터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혹사해야만 하는 이유도 없기에, 이곳에서는 오전 8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시떼 앞의 센 강어귀를 산책하다 만난 카페에 들러 신문을 읽는 동네 할아버지들 사이에 앉아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나서야 천천히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제는 옆 방 작가가 오전 1시가 넘도록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여러 사람과 떠드는 통에 결국 참지 못하고 찾아가 덕분에 잘 수가 없다고 항의했고, 다행히 항의는 받아들여졌지만 오전 2시가 되어서야 잠에 들 수 있었습니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 이불속으로 들어가며 '하여간 작가란 족속들이란...' 하고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작가였던 것입니다......





수요일 오후에는 하태임 선생님을 만나 선생님께서 참가하신 아트페어를 함께 구경하고, 지하철을 타고 시떼로 돌아왔습니다. 타지에서 나이와 경험을 떠나 격의 없이 작가로서 서로를 응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분을 만나며 안도하는 기분을 느끼는 일 또한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멋진 일입니다.

요즘의 파리의 날씨는 대부분 비가 올 것처럼 흐리지만, 지하철에서 나와 시떼로 걸어오는 짧은 길에는 구름이 물러가고 늦은 오후의 햇살이 거리를 비추었습니다. 서울에서라면,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를 잘 살아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면, 이곳에서는 이렇게 또 하나의 하루가 저물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줄이려 해도 줄글이 석양 그림자처럼 자꾸만 늘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2022년 4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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