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미국 뉴저지
레지던시의 추억 1 : 미국 뉴저지
2017년 1월
당시 나의 하루 일과의 시작은 아침 일직 아트 허브나 네오룩 (미술 관련 공모전 정보가 모이는 곳)을 훑고, 포트폴리오와 지원서를 넣을만한 곳을 체크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국내 공모 이외에도 한국이 아닌 곳에서 나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해외의 기관이나 레지던에 프로그램 공모에도 줄기차게 지원서를 보냈는데, 국내와 달리 해외 기관에 공모를 넣을 때에는 대부분 지원비를 내야 했습니다. 적게는 10달러에서 많게는 50달러까지. 그 지원비라는 것도 대체 몇 번이나 냈는지 기억할 수조차 없지만, 단지 해외 결제를 할 때마다 고지되는 문자 메시지의 예금 잔고가 끔찍하게 보기 싫었던 것만 똑똑하게 기억납니다.
그러던 와중에 미국의 뉴저지에 위치한 갤러리에서 운영하는 레지던시로부터 합격소식을 받았습니다. 3개월간의 프로그램 었는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과 개인전 개최까지의 지원은 해 준다고 했지만, 3개월 간 머물 수 있는 숙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나로서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고작 숙소 때문에 어이없게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여기저기 수소문해 본 결과 아는 분의 아들이 마침 뉴저지에 직장을 잡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다행히도 이야기가 잘 되어서 머무는 동안 잠시 신세를 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업실은 리치필드라는 동네에 위치한 갤러리 지하 1층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제가 전시 지킴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혜화동의 아르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셨던 서용선 선생님께서 먼저 와 작업을 하고 계셨습니다. 숙소에서 새벽에 일어나 점심 도시락 샌드위치를 싸 갖고 버스를 타고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항상 서용선 선생님께서 나보다 먼저와 계시곤 했습니다. 가끔 맞은편 도넛 가게에서 커피와 도넛을 사주셨고, 늘 샌드위치만 줄기차게 먹어대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종종 한인 타운에 데려가 순두부찌개도 사주시면서 그동안 해 오신 작업 이야기도 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오른팔은 일정 각도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붓을 잡다 보니 근육이 무리가 와서 어쩔 수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으셨습니다. 작업이 곧 인생의 전부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의 저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아서, 해야 할 대답을 잊은 채 어색한 감탄사만 뱉을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납니다.
뉴저지에 온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중, 신세 지던 집의 주인이 사정이 생겨 더 이상 재워줄 수 없다며, 그래도 한 달을 내가 그 집에서 지냈으니 최소한의 집세를 지불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처음 약속과 달라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다시 숙소를 수소문해 작업실 근처 한인타운의 어느 가정집에 간곡히 사정해서 500달러를 내고 2월 말까지 딱 한 달 동안만 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1월이었고, 개인전은 2월 중순부터 3월까지 예정이 되어있었으나, 3월까지 머물 수 있는 금전적인 여유가 없어 개인전 기간도 대폭 줄이고, 전시를 마치는 2월 말에 곧바로 미국을 떠나는 것으로 항공권을 변경했습니다. 처음 신세를 졌던 집주인은 내가 거처를 옮긴 한인타운의 그 집 앞까지 차를 타고 따라와 돈을 달라고 요구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현금지급기로 가 얼마간의 돈을 인출했습니다. 돌돌 만 20달러짜리 지폐 열 장을 운전석에 앉은 그에게 건네주던 그 어스름하고 추웠던 겨울날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하 작업실은 따로 난방이 되지 않아 근처 중고 전자제품 가게에서 산 작은 선풍기 모양의 전열기를 틀어놓고서 두툼하게 옷을 껴 입은 채로 작업을 했지만, 그래도 늘 즐겁고 설렜습니다. 미국이라는 장소, 내게 있어서 완전히 뒤바뀐 환경들에서 받은 영향들이 자연스럽게 생각을 넘어 캔버스 위로 튀어나왔습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창문을 한 번도 열지 않았던 케케묵은 방을 한 달 내내 환기시키는 기분이 들었고, 그제야 그림을 '그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쉬는 날에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창 밖의 풍경과 이따금 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비행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보고 싶은 이에 대한 그리움과 금전적인 고민만 아니라면 이렇게 언제까지고 여기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당장 내일의 일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가끔은 바보 같은 확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개인전을 올리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일단 물감의 단 한 방울까지 아껴 썼고, 캔버스 틀을 살 돈이 충분치 않아서 일단 천을 사다가 네 귀퉁이에 못을 박아 벽에 붙여놓고 작업을 했는데, 나는 오히려 이 상태도 시각적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시도 이런 방식으로 진행해보고 싶다는 의견을 갤러리에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근처 목공소에서 각목을 사다가 직접 일회용 캔버스 틀을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당연히 전기톱 같은 것도 없었으니, 거의 삼일 내내 팔 근육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톱질과 망치질을 했습니다.
전시를 올리고 나서는 어쨌든 전시를 개최했다는 뿌듯함 보다는, 심한 허탈감과 무기력을 느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설렘과 즐거움 속에서 내내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 넓은 미국이라는 땅에서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를 주목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고, 북경에서 20시간이나 걸리는 환승을 거쳐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서야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때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삼 개월을 보내는 지금, 그때의 내게 그 해 그 겨울의 언 땅에 작은 씨앗을 심어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위로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