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에서의 생일
모두가 잠이 든 새벽 다섯 시 반, 시떼 데자르를 나와 가로등의 불빛이 아른거리는 센강변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조용한 밤거리를 걸어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몽파르나스 역으로 향하는 길에서 한 달 전 파리에 막 도착했을 때 느꼈던 그 낯선 냄새가 다시 코끝에 스쳤다.
배낭은 아무리 짐을 줄이고 줄여도 9.5 킬로그램에 달했다. 전날 무게만 확인하고서 메보지도 않고 바닥에 놓아두었는데, 생장으로 떠나는 날 새벽, 방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앞으로 길 위에서 내내 나와 함께할 그 무게를 체감했다. '조금 무거운데'하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아직은 그 묵직함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길고 고단한 여행을 예견하게 해 주는, 그만큼의 애정과 증오가 함께 담길 무게감이었다.
몽파르나스 역에 삼십 분 일찍 도착해 페스츄리와 커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서 기차를 기다렸다. 9년 전 이 기차역에서 생장으로 향하는 기차가 도착할 플랫폼을 찾던 나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정말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 겁도 없이 청바지 차림으로 순례길에 올랐던 그때, 오히려 모든 것이 미지의 베일에 싸여있어서 모든 순간이 신선하고 기꺼웠던 그때의 나에게 조금 질투가 났다.
그래서 나이의 단위가 바뀌고, 먼 길을 돌아 다시 그때의 그 길 위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노파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너무 멋지고 빛나는 추억으로 보정된 과거의 그 시간들을 자꾸 비교하게 될만한 상황이 생길지 모른다는.. 영양가 없으면서도 집착하게 되는 걱정들. 그러나 9년이 지났지만 길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다시 그 길을 걷는 시간들이 그때보다 더 좋을 수도, 조금 더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그때 그 길 위에 섰던 내가 나 자신에게 품었던 무수한 질문들에 대해서 그래도 조금은 부끄럽지 않은 대답들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데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질문하기 위해 길 위에 서기로 했고, 그 질문들로 하여금 또다시 길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예비하고 싶다.
생장에 도착하기 전날에 예약했던 알베르게는 내가 9년 전 묵었던 알베르게 바로 옆에 붙어있는 아담한 건물이었다. 중년의 여주인은 무척 친절했고, 아침 식사는 6시 30분에 준비된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방에는 침대가 다섯 개 놓여 있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에는 독일에서 온 스테판이 날 반겨줬고, 이어서 호주에서 온 오스틴, 각각 아일랜드와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들이 차례대로 입장했다. 국적은 서로 다 달랐지만 다들 원래 하던 일을 잠시 혹은 완벽하게 때려치웠다는 멋지고 쿨한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예전에 알던 사이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눴다. 길 위로 떠날 순간을 목전에 뒀다는 이유로 생기는 국적을 초월한 동지애는 아무런 이유 없이 초면부터 기본 이상의 호감도를 보증하는 마법을 서로에게 걸어준다. 이렇게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순간 내가 품었던 그 노파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깨닫는다.
저녁에는 독일에서 온 스테판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엔과 함께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함께 하던 와중에 오늘 내가 생일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는 축하노래를 불러주었다.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던 생장에서 맞는 서른다섯의 생일은 이렇게 추억의 사진첩에 오래도록 기억되겠지.
내일의 첫 발자국에 대한 기대에 좀처럼 잠을 이루기 어려운 서른다섯의 생일을 생장에 남기는 첫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