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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May 01. 2022

다시 산티아고로 - 2일차

용기를 낼 수 있는 용기

2022년 4월 30일

하루 종일 안개


생장 - 론세스바예스 (24킬로미터)


잠에서 자꾸 깼다. 옆 자리 오스틴의 심각한 코골이가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고작 몇 시간 뒤면 여정이 시작된다는 사실에 마음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는 이불을 제외한 매트리스와 베개만 제공하기 때문에 순례자들은 모두 자신의 침낭을 가져와 펴고 자는데, 생각해보니 침낭에서 마지막으로 자본 게 9년 전 순례길에서였다. 번데기 속 애벌레처럼 침낭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다음날의 여정을 위해 어떻게든 자보려고 애쓰는데,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방 안의 다른 이들이 침낭 속에서 부스럭 거리며 내는 뒤척이는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으니.




아침식사는 오전 여섯 시 반이었으므로, 다섯 시쯤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1층의 부엌으로 내려갔다. 알베르게 주인은 시간에 맞춰 우리가 먹을 과일과 치즈, 살라미, 빵과 커피를 준비해주었다. 순례자들이 모두 둘러앉은 자리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잘 잤느냐고 물어봤고, 다들 연신 커피를 들이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오늘의 목적지와 순례길을 걷는 이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목적지가 같은 이들은 그곳의 알베르게에서 만나자며 약속했고, 목적지가 다른 이들에게는 행운을 빌어주었다.



식사를 마칠 때쯤, 알베르게 주인은 모두에게 오늘의 첫출발을 기념하는 세리머니에 참석하기를 제안했고, 우리는 거실에 둥그렇게 모여 섰다. 그녀는 선 채로 눈을 감아보라고 했고, 우리가 눈을 감자 우리의 여정을 축복하는 따뜻한 문장들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느샌가 그녀로부터 시작해 모두가 차례차례 손을 맞잡았고, 우리는 서로의 손과 손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를 느끼며 서로가 까미노에서 얻게 될 무언가에 대해 진심으로 응원해주며 포옹하는 것으로 세리머니를 마쳤다.  배낭을 메고 밖으로 나와서도 손바닥에 그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이 온기는 여정 내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론세스바예스라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수도원. 순례자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조금  가까운 마을에 여장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야  필요는 없지만, 나는 일정상 반드시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해야만 했다.  24킬로미터 떨어진 그곳까지 가는 데에는 처음 순례길에 당도한 뜨내기(?) 순례자들을 겨냥한 거대한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으니, 바로 '나폴레옹 ' 되겠다. 험준한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경사로 시작해 경사로 끝이 난다. 평지가 거의 없이 첫날부터 하루 종일 산을 탄다는 얘기다. 눈이 많이 오면 길이 폐쇄되기도 하고, 체력적인 문제로 우회로를 이용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나폴레옹 길이라는 명칭은 결국 사람들을  험난한 길로 이끄는 마력이 있다. 게다가 열정과 체력이 충만한 첫째 날에  길을 접하게 되기 때문에, 자신을 과신하게 되기도 하는  같다. 9 전에는 눈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하는 바람에 거의 밤이 되어서야 론세스바예스에 간신히 도착했었다. 어제 함께 저녁식사를 했던 앤은 나폴레옹 길에 도전했다가 얼마  가고 다시 돌아와 알베르게에서 하루  머물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미   정복했던 경험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 자신했기에 고민 없이 이번에도 나폴레옹 길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는 첫날부터 엄청나게 고생했다. 원래 우리의 뇌는 부정적인 기억이나 고통의 감각을 애써 망각하고  와중에 좋았던 기억들로 추억을 포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9 전에 그렇게  속에서 하루 종일 고생했으면서도 정작 기억나는  맑은 하늘 아래 아름답게 펼쳐진 피레네 산맥의 멋진 풍경들 뿐이었던 것이다. 그런 풍경이라도 있었다면 조금 위안이 되었을 텐데, 운명의 장난인지 산에 오를 때부터 하산할 때까지 10미터 전방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의 짙은 안갯속에서 노란 화살표를 찾아 길을 헤맸다.  분명히 고도는 높아지는  같은데, 어쩐지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돌고 있다고 느낄 정도로 사방으로 가득  안개의  속에서 걸었다. 그러면서도 지나치는 수많은 순례자들과 인사를 하면서, "부엔 까미노!(좋은 순례길 되세요!)"라는 말을 덧붙이는 일을 잊지 않았다.






론세스바예스에는 오후 두 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길을 걷는 중에 스페인 국경을 넘었고,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인사가 거짓말처럼 "봉쥬흐"에서 "올라"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산행을 했음을 생각하면 정말 부지런히 걸어서 제시간에 도착한 것이었다. 론세스바예스의 알베르게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숙소로, 180명이 넘는 순례자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그럼에도 최근 늘어난 순례자로 인해 내가 도착한 2시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고, 다행히도 나는 침대를 배정받아 여장을 풀 수 있었다. 이곳은 수많은 2층 침대에 순례자들이 빼곡히 가득 차기에 첫날과 같은 아기자기함은 없지만, 나폴레옹의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다는 사실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영광스러운 전투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고 꿀 같은 휴식을 맛보는 병사들의 막사에서 느껴질 것만 같은 기분 좋은 고단함의 분위기와 순례길의 첫 시험을 무사히 통과한 이들의 유쾌한 흥분이 알베르게를 달뜨게 했다.

이곳에서는 매일 오후 6시에 수도원의 성당에서 순례자들의 시작을 축복하는 미사가 열린다. 종교는 없지만 군대에서 초코파이 받으러 법당 가고, 햄버거 받으러 교회를 번갈아 다녔던 기억이 났지만, 지난번 순례길 때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놓쳤던 그 축복이 아쉬워서 미사에 참여해 순례자들을 따라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할렐루야와 아멘을 중얼거리고 헌금까지 했다. 이 정도면 나의 순례길을 위한 론세스바예스에서의 축복을 염치없이 거저 받지는 않은 것 같다.




나이를 더 먹어서 와서인지, 그동안 운동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둘 다여서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인 듯) 피레네 산맥을 넘은 첫 날인 오늘 알베르게에 도착해보니 양 어깨는 벌써 조금 멍들었고, 발과 무릎도 무척 피로하다. 문득 지난날 순례길에서 힘든 순간마다 오히려 내 삶과 미래가 이 순례길 같았으면 좋겠다고 써 놓았던 기억이 난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이 주는 모든 고통과 환희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이길 바랐다. 이 길은 그런 종류의 용기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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