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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 이규봉 Jul 14. 2021

6. 비유클리드 기하와 다름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인가?,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무지는 편견을 낳는다


   조선시대 청백리의 대명사인 황희 정승에게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황희 정승이 사랑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밖에서 계집종 둘이 악을 쓰고 다투고 있었다. 황희가 밖으로 내다보자 원체 마음이 너그러운 주인인지 아는지라 다투던 계집종 중 예쁜이가 쪼르르 달려가 사실을 일러바치며 자신이 옳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황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네가 옳다’고 답을 했다. 그러자 다른 계집종 곱단이가 다시 그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황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너 역시 옳구나’ 했다고 한다. 그러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황희 정승의 부인이 어처구니가 없어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이 그른 일이 아닙니까? 나라 정치도 그와 같이 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니 황희 정승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당신 말도 옳소’라고 대답했다.”

   이와 같은 황희 정승의 말을 이도 저도 아닌 말장난일 뿐이라며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황희 정승의 대응은 다툼을 피해가는 매우 현명한 방법이다. 상대방의 처지를 잘 이해하면 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닌 한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는 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 한다. 비록 다른 사람의 의견이 자기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네가 잘못했다고 또는 틀리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면 그가 한 주장도 옳을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의견은 틀리다고 하면 여기에는 항상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황희 정승의 어법을 닮으면 오해에서 오는 많은 다툼이 사라질 것이다. 

   맹자에 나오는 말이다. 순임금 때 농사를 책임진 신하 후직은 천하에 굶주리는 자가 있으면 자기의 잘못으로 그가 굶주린다고 생각해서 백성 구제를 급하게 여겼고, 하나라의 우임금은 천하에 물에 빠지는 이가 있으면 자기가 물 관리를 잘못해서 그가 물에 빠졌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처럼 남을 탓하지 말고 자신을 탓하면 서로 싸울 일이 없다.

   우리나라는 매우 역동적인 나라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땅 위에 이제는 명실공히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 과거 식민지였던 후진국이 선진국 대열에 오른 것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국내적으로는 최근 한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두 대통령을 감옥에 넣었다. 이러한 와중에 엄청난 사회적 혼란에 휩싸였다. 한쪽에선 촛불을 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태극기를 펄럭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틀렸다고 하며 서로 죽일 듯이 덤벼들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탈핵을 선언하자 또 충돌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담당 산업부 장관이 기소되는 초유의 사건도 발생했다. 무소불위한 권력을 가진 검찰을 개혁하자는 것에 대한 반발도 매우 심해 검찰총장을 지낸 자가 임기를 채우지 않고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 이 시점의 화두는 너무도 다양하다. 


   제주에 제2의 공항을 건설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남북 화해로 가야 하나? 아니면 남북 대결로 가야 하나?

   핵발전을 계속 확대해야 하나? 아니면 점차 줄여야 하나? 

   검찰개혁을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두어야 하나? 

   부동산을 시장에 맡겨야 하나? 아니면 규제해야 하나?  

   과거의 적폐를 청산해야 하나? 아니면 그만두어야 하나? 

   재난지원금을 모두 주어야 하나? 아니면 저소득층만 주어야 하나?


   이중 어느 것도 한쪽이 100% 옳고 다른 쪽이 100% 틀린 것은 없다. 단지 서로의 생각이 다를 뿐이다. 서로의 생각이 다른 이유는 살아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상대방이 틀렸다고만 생각한다. 그래서 늘 다툼이 일어난다.

   수학의 결과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1+1=2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수학의 결과들은 상대적으로 결과가 나오기 전에 반드시 주어진 가정이 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가정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단위를 ‘방울’로 하면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더하면 그 결과는 물 한 방울이 된다. 즉 1+1=1이 될 수도 있다. 이때의 주어진 가정은 크기라든가 무게라든가 개수가 아닌 모양이다. 물 한 방울에 물 한 방울을 더하면 그 모양은 다시 물 한 방울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학교에서 삼각형에 있는 세 내각의 합은 180도라고 배웠다. 한 바퀴를 균등하게 360등분했을 때 그 한 각을 1도라 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고 가르쳤고 그렇게 배워왔다. 그래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로 알고 있다. 정말 삼각형을 구성하는 내각의 합은 180도일까? 같은 이유에서 “주어진 직선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그 직선과 평행인 직선은 단 하나 있다.”라고 배웠다. 주로 철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하지만 이 역시 주어진 조건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 

   동그란 공 표면에 삼각형을 그리고 그 내각의 합이 정말 180도인지 살펴보라. 이번엔 표면이 아닌 공 내부에 삼각형을 그려봐라. 또는 나팔의 겉면에 그려보는 것도 좋다. 그 내각의 합이 정말 180도인지 살펴보라. 평면 위에 그려진 삼각형과 같이 그 내각의 합이 180도일까? 또한 공 표면에 한 직선을 긋고,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면서 그 직선과 나란한 선을 그어봐라. 그러한 직선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엔 공 표면이 아닌 공 내부에 들어가 있다고 가정하고 천정에 주어진 직선과 평행한 선을 찾아봐라. 의외로 평행선이 너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고,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그 직선과 평행인 직선은 단 하나 있다는 것은 옳다는 것인가? 틀리다는 것인가? 얕은 지식이 당신을 오만하게 만든다. 무지는 편견을 낳고 편견은 폭행을 동반한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직각을 90도라고 할 때 다음 그림과 같이 직선을 이루는 각AOB는 2직각으로 180도가 된다. 

   아래 그림과 같이 삼각형 ABC의 꼭짓점 B를 지나고 선분 AC에 평행한 직선을 긋고 그 위에 점을 D와 H라 하자. 각C는 각HBC와 엇각으로 같고 각A는 각ABD와 엇각으로 같다. 그러므로 삼각형 ABC의 내각의 합 각A+각B+각C = 각ABD+각B+각HBC로 180도가 된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임을 설명하면서 한 점 B를 지나고 주어진 직선 AC에 평행인 직선 DH는 단 하나밖에 없음을 묵인했다. 이러한 평행선이 여러 개 있다거나 또는 하나도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럴 수는 없다고? 그러면 그러한 평행선이 단 하나뿐이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지금껏 우리가 배워온 기하학은 유클리드(Euclid, BC 365-300)가 저술한 <원론(Elements)>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가 <원론>을 그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그 내용을 배웠다. <원론>은 성경 다음으로 세계 사람에게 많이 읽힌 책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껏 배워온 기하학을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한다. 이 기하학은 다음과 같은 5가지의 가정(또는 공준, postulate) 아래에서 시작한 것이다. 


   (1) 한 점으로부터 또 다른 한 점으로 직선을 그을 수 있다.

   (2) 유한 직선은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

   (3) 임의의 점을 중심으로 다른 임의의 점을 통과하는 원을 그릴 수 있다.

   (4) 모든 직각은 서로 같다.

   (5) 한 직선과 두 직선이 만날 때 어느 한쪽의 두 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으면, 이 두 직선을 무한히 연장할 때, 2직각보다 작은 각이 이루어지는 쪽에서 두 직선은 반드시 만난다.

   여기서 공준이라 함은 그것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모든 명제에 어떠한 모순도 나지 않도록 처음에 내세우는 것으로 증명 없이 인정하는 명제라 할 수 있다. 다섯 번째 가정을 평행공준이라 하며 플레이페어(J. Playfair, 1748~1819)는 이를 좀 더 쉽게 풀이하여 ‘한 직선과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점 P가 있을 때, P와 그 직선이 속하는 평면 위에는 직선과 평행하면서 P를 지나는 직선이 오직 한 개만 존재한다.’는 명제를 만들고 평행공준과 동치임을 증명하였다. 평행공준을 대신하여 우리가 배워온 것이 이 명제이다. 마치 기독교에서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믿듯이 유클리드 기하학(또는 포물기하학)은 위 다섯 명제를 인정하고 그 위에 세워진 학문이라 할 수 있다. 

   평행공준을 제외한 처음 네 가지의 가정에서 출발하는 기하학을 절대기하학이라 한다. 그러므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평행공준을 인정해야만 성립된다. 즉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단 하나 있다.”라고 가정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따라서 평행공준을 인정하지 않으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닐 수도 있다.

평행공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직선이란 점이 그 위에 균등하게 놓인 선이다.”로 정의되어 있으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BC287-212)가 “직선은 두 점을 연결하는 최단의 선이다.”로 다시 정의하였다. 유클리드는 “평면이란 직선이 그 위에 균등하게 놓인 면이다.”로 정의하였다. 즉 평면은 그 위의 임의의 두 점을 지나는 직선이 그 위에 놓여있어야 한다. 즉 우리가 지금껏 배운 기하학은 모두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그래서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이 단 하나 있다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삼각형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다음 각 명제는 모두 같은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만이 옳은 것이라고 지금까지 믿어왔다. 그러나 가정이 달라지면 결론도 달라진다.


(1) 한 직선이 평행인 두 직선의 하나와 만나면 반드시 다른 평행선과도 만난다.

(2) 평행선은 어디서나 거리가 똑같다.

(3) 주어진 선 위에 있지 않는 한 점을 지나는 평행선은 오직 하나뿐이다.

(4)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작다


   러시아의 수학자 로바체프스키(N. I. Lobachevsky, 1793 - 1856)는 1829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최초의 논문 <기하학의 원리에 관하여>를 러시아어로, 1840년 <평행선 이론에 대한 기하학적 연구>를 독일어로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평행선의 존재를 하나 이상으로 가정하였다. 

   헝가리의 볼리야이(J. Bolyai, 1802-1860)도 로바체프스키와는 독립적으로 연구하여 1832년 ‘만일 한 점을 지나 주어진 직선과 평행인 직선이 하나 이상 있다고 하면’이라는 가정 하에 모순이 없는 새로운 기하학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엄청난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이미 3년 전에 로바체프스키가 러시아 잡지에 발표했음을 알고 볼리야이는 정신적 우울증에 빠져 더 이상 연구를 발표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의 가우스(C. F. Gauss, 1777 - 1855)도 독립적으로 볼리야이가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이미 새로운 기하학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연구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고 그의 사후에 알려지게 되었다.

가우스, 로바체프스키, 볼리야이

   유클리드 기하학의 평행공준 대신 “한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두 개 이상 존재한다.”라는 가정 아래 생성된 기하학을 로바체프스키 기하학(또는 쌍곡기하학)이라 한다. 이 기하학이 성립하는 (벨트라미)모형으로 그림 9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 모형은 추적선이라는 곡선을 회전하여 얻은 곡면이다. 마치 나팔꽃의 겉 표면과 비슷한 이 곡면을 의구라 하며 쌍곡기하학에서 평면이 된다. 다음 그림에서 직선 BC와 AD는 평행선이며 직선 l에 평행하고 점 P를 지나는 직선은 적어도 두 개 이상 존재한다. 이 위에서 삼각형을 그리면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작게 된다.

쌍곡평면

  쌍곡기하학에서는 다음 사실이 성립한다.


(1) 임의의 직선과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임의의 점 P에 대하여 P를 지나고 그 직선과 평행인 직선은 적어도 두 개 존재한다.

(2)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작다.

(3) 모든 블록 사각형의 내각의 합은 360도보다 작다.

(4) 두 삼각형이 닮은꼴이면 그들은 합동이다.


   쌍곡평면에서 보듯이 움푹 들어간 면에서 삼각형을 그리면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작게 된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도보다 작다는 것은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이 여러 개 있다는 말과 같다. 

   쌍곡기하학에서는 두 삼각형이 닮은꼴이면 그들은 합동이므로 삼각형을 찌그러뜨리지 않고 확대, 축소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확대, 축소는 닮은꼴이므로 그것은 곳 사진의 실물 크기와 같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다


   독일의 리만(G. F. Riemann, 1826-1866)은 1854년 괴팅겐 대학의 강사 취임 강연에서 “기하학의 기초를 이루는 가정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기하학을 발표하였다. 리만은 “한 평면 위에 있는 임의의 두 직선은 반드시 만난다.”로 가정하여 평행공준의 평행선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준 2 ‘유한 직선은 무한정 연장할 수 있다’에 대하여 ‘직선의 크기가 무한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끝이 없다거나 또는 경계가 없다.’로 생각하여 공준 1과 공준 2 그리고 평행공준을 아래와 같이 수정하였다.


   (1) 임의의 두 점은 적어도 하나의 직선을 결정한다.

   (2) 직선은 경계가 없다.

   (5) 한 평면 위에 있는 임의의 두 직선은 반드시 만난다.


   이와 같이 수정된 가정과 함께 태어난 새로운 기하학을 리만기하학(타원기하학)이라 한다. 이 기하학이 성립하는 (리만)모형으로 다음 그림과 같이 구면(타원)을 평면으로 보았다. 이 평면에서는 직선은 표면 위의 두 점을 지나는 가장 큰 원(대원)으로 보았다. 따라서 구면에서는 직선은 경계가 없지만 유한하므로 유클리드의 두 번째 공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중심에 관한 대칭점을 지나는 직선은 무수히 많을 뿐 아니라 모든 직선은 만나므로 평행선은 없다. 

리만모형

   타원기하학에서는 다음 사실이 성립한다.


(1) 임의의 직선과 그 직선 위에 있지 않은 임의의 점 P에 대하여 P를 지나고 그 직선과 평행인 직선은 없다.

(2)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다.

(3) 사각형의 내각의 합은 360도보다 크다.

(4) 두 삼각형이 닮은꼴이면 그들은 합동이다.


   다음 그림에서 보듯이 볼록 나온 면에서 삼각형을 그리면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게 된다. 즉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보다 크다는 말은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고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이 없다는 말과 같다.

타원기하학에서 삼각형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

     

   이처럼 수학의 진리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대적인 진리이다. 주어진 조건이 다르면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법이다. 하물며 세상 살이인들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똑같이 벌어진 일을 예쁜이가 자기 위주로 설명하니까 예쁜이가 옳다고 생각되고, 곱단이 역시 자기 위주로 설명하니까 곱단이가 옳은 것처럼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황희 정승의 부인 말도 옳은 것이다. 

   아래 그림을 보자. 심리 테스트를 하는 데 많이 사용하는 그림이다. 똑같은 그림을 보았는데도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 어떤 사람은 귀부인이라 하고 다른 사람은 마녀라 한다. 누가 옳은가? 의견이 다르다고 한쪽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가? 배경 또는 가정에 따라 평행선이 없을 수도, 하나뿐일 수도 또는 많을 수도 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것만이 옳은 것은 아니다. 작을 수도 클 수도 있다. 배경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만 하면 끊임없는 논쟁이 되고 해결은 나지 않고 다툼만 커진다. 우긴다고 될 일은 아니다.   

   종교도 상대적으로 볼 수 있으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하느님과 예수에 근거한 종교는 기독교, 부처님과 석가모니에 근거한 종교는 불교, 그리고 알라와 무함마드에 근거한 종교는 이슬람교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의 기준으로 다른 종교를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다수가 소수를 배척하고 탄압하는 데에는 편견이 큰 영향을 미친다. 유럽의 중세시대의 성직자들의 편견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로 종교적 광신과 어울려 엄청난 희생을 불러일으켰다. 기독교도 로마 제국 초기에는 소수의 집단이었다.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극히 주관적인 이유로 2차 대전 중 벌어진 홀로코스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중세에 마녀로 희생되었다. 종교적 차이를 인정하지 못해 전쟁을 일삼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문둥병이라고도 하는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로 소록도에 격리 수용하여 노동을 착취하고 모진 고문을 감행한 적이 있다. 또한 정치적으로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을 일삼기도 했다. 빨갱이는 원래 일제강점기 시절 항일 유격대원을 지칭하는 빨치산(partisan)에서 나온 말이다. 당시 항일 유격대원 중에는 자본주의 일본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많기는 했다. 요즘 같은 의미의 빨갱이는 1942년 이승만이 미국 당국에 광복군 편입을 제안한 편지에서 ‘자신과 반대되는 조직’을 빨갱이로 몰아감에서 비롯되었다. 이승만이 등장하면서부터 미군정과 친일파, 그리고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빨갱이라고 칭했다. 이승만은 국민을 좌우로 나누어 민주인사까지 빨갱이로 몰아 정치보복과 학살을 자행하여 백만이 넘는 우리 민족을 학살하게 한 장본인이다.

   이와 같은 일은 모두 편견을 갖고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틀린 것으로 인식해서 일어난 결과이다. 황희 정승은 세 사람을 천천히 둘러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제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제가 잘한 일만을 쳐드는 법이다. 각자 잘한 일만 나에게 고해 바치니, 나도 모두 다 잘했다고 할 수밖에 다른 수가 있는가?” 


이와 같이 무슨 일에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남에게 자신의 주관적 의견을 내보이지 않을 때 삼가정승(三可政丞)이라 한다. 폭넓게 알면 그만큼 보이는 것이 많고 판단을 바르게 할 수 있다. 항상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다툼이 없이 잘 해결할 수 있다. 수학의 모든 결과가 상대적인 진리라는 것을 알고 항상 남의 처지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다툼이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장자』의 「제물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것은 저것이고 저것은 이것이며, 저것도 일면의 시비가 있고 이것도 일면의 시비가 있을 것이니, 과연 저것과 이것의 차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을 패거리 짓지 않는 것이 도의 근본이다.”


   시비를 가린다는 것은 패거리를 짓는다는 것이다. 장자가 말한 도란 결국 패거리를 짓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시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초월해야 사람들은 마음의 태평과 평온함을 누릴 수 있다. 이쪽에서 보면 저것이지만 반대로 저쪽에서 보면 오히려 이것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지 않았기에 내가 옳다고 상대방이 틀린 건 아니다.

   무수히 변화하는 세상살이에 이것과 저것을 절대적인 것처럼 분별하고 차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넓을수록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자기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절대로 틀렸다고 말하면 안 되고 다르다고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기와 다른 그 이유를 굳이 알고 싶으면 이렇게 말해라. “너는 왜 그렇게 생각하니?”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배경과 영향


   평행공준은 다른 공준과 달리 간단하지도 않고 문장도 매우 길다. 또한 ‘무한히’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 의미를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공준의 내용을 유한적인 내용으로 또는 좀 더 간결한 말로 바꾸고자 하였다. 많은 수학자가 평행공준을 다른 공준을 이용하여 증명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더구나 18세기의 유명한 철학자인 칸트(E. Kant)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와 공준은 인간의 마음에 부과된 선험적인 판단으로, 이 공리와 공준 없이는 공간에 대한 어떠한 무모순의 추론도 불가능하다”라고 하여, 평행공준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은 칸트의 철학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셈이고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하던 권위적인 분위기에 맞서야 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가우스와 볼리아이 그리고 로바체프스키에 의하여 발견된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했다. 1871년 클라인은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서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두 개 이상 존재한다’를 쌍곡공리라 하고, 이에 근거한 기하학을 쌍곡기하학라 했고, ‘주어진 직선 위에 있지 않은 한 점을 지나서 주어진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근거한 기하학을 타원기하학라 했다. 쌍곡공리에 대한 무모순성은 벨트라미, 클라인, 푸앵까레 등이 증명하였다. 따라서 유클리드 기하학에 모순이 없다면 쌍곡기하학에도 모순이 없게 되었다. 결국 평행공준이 다른 공준들과 독립이라는 것이 인정되었으며 기하학을 전통적인 틀에서 해방시켜 다른 기하학의 체계를 창조하게 되었다. 이는 수학의 진리는 ‘절대적이다’ 라는 견해에 타격을 주어 수세기 동안 지배했던 사고의 형태를 깨트려 인간의 사고에 큰 전환점을 가져왔다. 칸토어는 ‘수학의 본질은 그것의 자유에 있다’고 하여 수학자는 마음대로 수학적인 체계에 근거할 공준을 고안해서 단지 그것들이 모순이 없기만 하면 실제적인 물리적 공간에  얽매일 필요 없이 인공적인 기하학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생기고 2000년이나 지난 후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온 이유는, 유클리드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전연 다른 의식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었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던 칸트의 공간철학이나 인식론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탄생에 저항했으며, 과학세계를 지배하던 뉴턴(I. Newton, 1642-1727) 역학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탄생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평면에서의 기하학이고. 로바체브스키 기하학은 오목한 면에서의 기하학. 그리고 리만 기하학은 볼록한 면에서의 기하학으로 볼 수 있다. 이 세 가지의 기하학은 충분히 작은 지역에서는 거의 일치한다. 뉴턴 역학과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역학은 좁은 지역에서는 거의 일치하나 우주에서는 매우 다르다. 특히 리만기하학이 우주를 가장 잘 설명한다. 리만기하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의 수학적인 모델이 되어 중력장 설명에 이용되었다. 

   실질적인 우주 세계를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는 기하학은 아직 없다. 우리는 유클리드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유클리드 공간에서 살고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말하는 엄밀한 의미의 직선 또는 평면이 현실에 존재할까? 그것들은 엄청 큰 원의 한 부분 또는 엄청 큰 구의 한 부분으로 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시사 및 읽을거리


기세춘, 『장자』, 바이북스, 2011

경향신문 2018.11.22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

         2019.3.4 ‘빨갱이’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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