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분은 모두 합하는 것, 고통과 쾌감의 합이 모두 같다면?
뉴질랜드에서 첫 마라톤 완주
필자가 뉴질랜드에서 잠시 거주할 때 스파이츠라는 맥주를 만드는 회사가 주관하는 울트라 삼종경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매년 2월에 열리는 <스파이츠의 해안과 해안 삼종 경기(Speight's Coast to Coast Multisports Race)>이다. 이 대회는 뉴질랜드 남섬의 서해안 쿠마라 해변에서 출발하여 우리의 대관령보다 훨씬 높은 아써스 고개를 넘어 동해안의 도시 크라이스트쳐어치까지 가는 대회로 1박 2일 동안 남섬을 횡단하는 매우 힘든 경기이다. 카약으로 67킬로미터의 계곡물을 따라가고 36킬로미터에 이르는 산길을 달리며 140킬로미터의 도로를 자전거로 주행하는 경기로 혼자서 할 수 없는 후원할 지인이나 가족이 총출동하는 대회이다. 이 대회에 필자와 비슷한 연배의 한 아는 한국인이 참가해 완주하는 것을 직접 봤다. 정말 감동이었다.
10킬로미터 장거리 달리기를 즐겼던 필자는 이미 그 전 해인 2003년 11월에 <켄터베리 봄철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21.1킬로미터를 2시간 5분 29초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하프 마라톤 첫 출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울트라 삼종경기 완주는 나에게는 멀기만 했던 마라톤 완주의 꿈을 심어주었다. 6월 6일에 열리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Elizabeth II)를 기념하는 크라이스트쳐어치 마라톤 대회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대회 참석을 위해 100일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 매일같이 조금씩 거리를 늘려가며 연습했다. 몸 구석구석이 아프고 탈이 났다. 그것을 모두 극복하고 참가했다.
대회가 시작되면서 처음 25킬로미터까지는 그냥 흥겨웠다. 흥얼거림이 절로 나왔다. 거의 힘도 들지 않았고 즐기면서 달렸다. 그러나 30킬로미터가 되자 다리는 경직되기 시작했다. 나보다 뒤처진 사람들이 계속 나를 앞서갔다. 다리는 점점 뻣뻣해지고 한걸음 한걸음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도대체 내가 왜 이걸 시작했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온갖 곳에 마라톤 완주할 거라고 광고를 해놨으니 그만둘 수도 없었다. 아테네의 승전을 알리려 달려간 아테네 병사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도착지점이 멀리 보이면서 달린 다기보다는 거의 발을 질질 끌다시피 가며 결국 테이프를 끊었다. 완주를 하자 밀려드는 쾌감은 그동안 겪은 고통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기록은 4시간 36분 17초였다. 마라톤 완주는 내 생애의 가장 기뻤던 3대 사건 중 하나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세 번째 성취한 마라톤 완주는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맛을 나에게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이상의 성취욕을 만끽하게 하였다.
고생은 사서도 한다
생활이 안정되고 경제가 점차 좋아지면서 비만은 현대인의 가장 큰 걱정거리 중 하나가 되었다. 자동차와 도로의 발달로 걷는 것이 줄어들고 식생활의 양식이 변하면서 몸이 점점 불어난다. 비만을 해결하기 위해 다이어트 같은 식이요법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필자도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몸무게와 허리둘레가 10%나 줄었다.
운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특정한 규칙 아래서 상대방과 겨루며 함께 즐길 수 있는 것과 오직 자신과 겨루며 힘든 것을 참으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다.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는 축구, 농구, 테니스, 골프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에 해당하는 경우는 달리기, 산악자전거, 등산, 삼종경기 등을 들 수 있다.
달리기를 재미있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살을 빼고 체력을 좋게 하기 위해 힘든 것을 참고 꾸준히 달릴 뿐이다. 즉 자신과의 경쟁이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달리는 자체가 점점 고통스러워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감내하며 달리다가 멈추었을 때, 숨은 차지만 고통이 사라진 그 느낌은 너무도 좋다. 특히 마라톤을 하다 보면 시간이 지나갈수록 달리는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지나, 완주를 하게 되면 그 고통이 없어지는 쾌감과 아울러 성취감을 포함하는 쾌감에 따른 즐거움은 인생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산악자전거를 타는 경우 자전거를 타고 산을 올라가기도 하지만 끌고 갈 때도 있고 심지어는 메고 갈 때도 있다. 가파른 곳을 끌기도 하고 메고 가기도 하는 그 힘든 과정은 정상에서 심호흡하고 경치를 즐기며 다시 내려 달리는 기쁨을 준다. 오르막의 고통은 내리막의 환희로 바뀐다.
등산도 그렇다. 우스개 말로 “내려올 거 뭐하러 올라가냐” 하며 야유도 한다. 하지만 험한 산길을 올라가는 것은 정상에 올라가 본 사람만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오르는 것이 어려울수록 정상에서 맛보는 즐거움은 훨씬 좋다. 상쾌한 바람을 마시고 멀리 펼쳐진 경치를 구경하면서 잠시 숨을 돌릴 때 그동안 느꼈던 고통은 어느새 사라진다.
철인삼종경기와 트라이애쓰론이라고 하는 경기도 역시 그렇다. 철인삼종경기는 1978년 하와이에서 성행하던 와이키키 바다수영 3.9킬로미터와 하와이 도로사이클 180.2킬로미터 그리고 호놀룰루 국제마라톤(42.195킬로미터)의 3개 대회를 한 사람이 쉬지 않고 경기하도록 구성한 데서 유래했다. 대회 제한시간인 17시간 이내에 완주하면 철인(Iron man)의 칭호를 받는다. 올림픽 종목인 트라이애쓰론는 수영 1.5킬로미터와 자전거 40킬로미터 그리고 달리기 10킬로미터를 이어서 한다. 수영을 하고 난 후 자전거를 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달리기를 하는 이 운동은 세 가지의 서로 다른 힘든 운동을 함께하는 것으로 이 역시 매우 힘드나 완주할 때 오는 기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그 후에 오는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운동을 꾸준히 하면 몸이 좋아지지만 재미가 없으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다. 오랜 시간 지속되어 온 그 고통을 한방에 날려주는 쾌감이 있기에 나는 이러한 운동을 좋아한다. 이러한 운동은 하면 할수록 체력이 보강되어 고통은 점차 줄어들고 즐거움은 점점 커진다.
적분은 합하는 것
이와 같이 우리가 느끼는 고통과 쾌감의 관계를 수학으로 알아보자. 시간 t에 따라 느끼는 고생과 쾌감은 시간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시간 t에 따라 고통을 느끼는 함수를 y=고통(t)이라 하고, 쾌감을 느끼는 함수를 y=쾌감(t)라고 하자. 그러면 고통이나 쾌감을 당하고 있는 시간 동안의 느끼는 모든 어려움이나 즐거움을 적분을 이용하여 알아보자.
적분은 모두 합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a1과 a2를 합하면 a1+a2라 쓰듯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여러 개를 합할 때는 a1+a2+…+an와 같이 표기한다.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이 불편하므로 수학에서는 합할 때 Σ(시그마)란 기호를 사용하여 간단히 Σak, k=1부터 n까지로 표기한다.
시그마란 기호는 자연수의 개수만큼 무한개를 합할 때는 무한의 기호 ∞를 사용하여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하나, 둘, 셋, 이런 식으로 무한히 합하는 것이 아닌 연속적으로 무한히 많이 합하는 경우[10장 참조]에 적분 기호 ∫f(x)dx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구간 (0, 10) 위에 높이가 2인 것들을 모두 쌓은 직사각형의 면적은 Σ를 사용하지 못하고 적분을 사용하여 0에서 10까지 ∫f(x)dx라 하고 그 값은 20이 된다. 여기서 f(x)=2이다.
고생을 하면서 처음 고통을 느끼는 시간을 0이라 하고 끝나는 시간을 b라고 하면 그동안에 느낀 어려움을 모두 합한 것은 적분 기호를 사용하여 0에서 b까지 ∫고통(x)dx로 나타낼 수 있다. 고생이 끝나면서 동시에 시작되는 쾌감이 끝나는 시간을 d라고 하면 그동안에 느낀 쾌감은 b에서 d까지 ∫쾌감(x)dx로 나타낼 수 있다. 사람의 정신적, 육체적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니 고생한 사람 억울하지 않게 이 둘을 서로 같다고 보는 것이 공정할 것이다.
고생을 느끼는 시간은 대체로 길고 기쁨은 짧은 순간에 느낀다. 마라톤의 경우 일반인은 4시간 넘게 달리며 꾸준히 고생하지만 완주를 하고 쉬면서 기쁨을 느끼는 시간은 훨씬 작다는 뜻이다. 즉 b와 d의 간격은 보다 훨씬 작다. 그러므로 위 식이 성립하려면 기쁨의 강도가 고생보다 훨씬 커야 한다. 그 뜻은 비록 느끼는 시간은 짧을지라도 기쁨의 크기는 모든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고통을 느끼는 함수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겠지만 고통이 꾸준히 이어진다는 연속적인 면에서는 모두 같다. 아주 단순히 하여 시간이 갈수록 일정하게 힘들어진다고 하자. 즉 처음부터 10시간까지 고생하는 양은 시간에 비례하는 고통(t)= t/2 라 하자. 10시간 후 고생이 사라지고 순간(계산의 편의를 위해 1시간 동안이라 하자)에 쾌감을 균등하게 느낀다고 하자. 그러면 시간이 지날수록 느끼는 고통의 양은 0에서 10까지 ∫t/2dx이다. 이와 같은 양의 쾌감을 1시간에 균등하게 모두 느끼므로 쾌감은 상수가 되고 이를 c라 하면 10에서 11까지 ∫cdx=25가 된다. 25=c(11-10)이므로 c=25가 되어 쾌감의 강도는 한 시간 내내 25가 된다.
위 그림에서 직사각형의 밑변의 길이에 해당하는 쾌감을 느끼는 시간이, 삼각형의 밑변의 길이에 해당하는 고통을 느끼는 시간보다 10배는 크므로 쾌감을 느끼는 그 강도는 고통스러움을 최고로 느낄 때보다도 5배 이상에 해당한다(사각형의 면적은 밑변의 길이 곱하기 높이이지만, 삼각형의 면적은 밑변의 길이 곱하기 높이의 반임). 쾌감을 느끼는 시간이 순간이라면 순간에 일어나는 쾌감은 더욱 엄청나게 커진다. 그래서 그동안 겪었던 어렵고 힘들었던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순간에 쾌감을 얻는다. 이 순간의 쾌감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즐거움의 여운을 남겨준다.
이 맛에 사람들은 달리기를 하고 등산을 하고 산악자전거를 탄다. 아울러 인생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감내하고 희망을 갖고 노력하며 살면 지난날의 어려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산다.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친다.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하면 해를 당한다는 뜻으로 늘 선행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즉 덕을 쌓으라는 것이다. 덕을 쌓는 것이 바로 복을 짓는 것이며, 이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동양 최고의 경전인 『주역』에서는 ‘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이라고 한다. 착한 일을 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고, 착하지 못하게 굴면 필히 재앙이 있을 것이다 라는 뜻으로 선행이고 악행이고 자신이 못 받으면 자식이 물려받을 것이라고 한다. 『명심보감』에서는 ‘범사노복 선념기한(凡使奴僕 先念飢寒)’이라고 가르친다. 무릇 사람들을 부릴 때에는 우선 그들의 춥고 배고픔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뜻으로 잘 먹이고 따뜻하게 해 주라는 뜻이다. 이 모두 다 선을 베푸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덕을 쌓는 것이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것보다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가 베푼 덕은 차곡차곡 쌓인다. 마찬가지로 자기가 저지른 악행 역시 차곡차곡 쌓인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적분이다. 자기가 복을 짓는 만큼, 또는 악을 행하는 만큼 후일 다 돌려받는다. 자신이 못 받으면 자식이 또는 후손이 자신이 행한 덕이든 악행이든 다 물려받게 된다. 그래서 현명한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선행을 베푼다. 복을 받으려 하지 않고 복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언젠가는 복을 돌려받는다. 그런데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복은 주지도 않았으면서 복 받을 생각만 한다. 이제부터 새해 인사는 이렇게 바꾸는 것이 어떨까?
“새해부터는 복 많이 지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