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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찬 이규봉 Feb 28. 2016

폭우 속의 3박 4일

[뉴질랜드 밀포드 트래킹 ③] 오직 자연광과 태양전기 그리고 빗물

지난 12년간 기다려왔던 오늘이다. 9시 45분 센터 앞에서 버스를 타고 테 아나우를 떠날 때는 흐렸지만 비가 오지는 않았다.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30분 채 안 걸려 25킬로미터 떨어진 선착장인 테 아나우 다운스에 도착했다. 배에  타고나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10시 반에 떠난 배는 1시간 남짓 걸려 입구에 도착했다. 

테 아나우 다운스의 풍경과 타고 갈 배

가는 도중 완벽한 색깔의 무지개가 우리를 반기듯 반짝 웃어주는 것 같았다. 전체 거리 53.5킬로미터의 밀포드 트랙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고 발걸음을 뗐다. 출발부터 비를 맞은 것이 끝날 때까지 비를 맞으며 끝냈다. 길은 잘 나 있고 이정표도 잘 되어있다.  1킬로미터쯤 가니 글레이드 하우스(Glade House)가 나온다. 퀸스타운을 출발한 관광상품으로 온 사람들은 여기서 첫 밤을 보낸다고 한다. 클린턴 강을 따라 원시림 속에 잘 나 있는 폭 1미터 정도의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내린 비로 물이 가운데 고여 있어 가상이로 피해 다녔다. 1시간 반 정도 약 5킬로미터를 걸으니 클린턴 산장(Clinton Hut)이 나온다. 해발고도  250미터쯤 된다. 

이층침대가 각 방마다 10개씩 있다.

두 개의 방에 각각 20개의 침대가 이층으로 놓여 있다. 신발은 벗어 문 밖에 놓아야 했다. 가운데 놓인 이층침대  아래위를 선점했다. 등은 없고 창으로 들어오는 자연광뿐이다. 내 위로 창이 나 있어 비가 와도 내부는 9시까지 환했다. 식당엔 가스레인지가 놓여있고 싱크대도 있다. 물은 그냥 마실 수도 있으나 끓여 먹어도 좋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모든 물은 빗물을 받아 정수해 사용한다. 라이터나 성냥은 없으니 각자 지참해야 한다. 햇빛 집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기는 햇빛으로 생산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식당에 전기등은 있으나 일정한 시간에 산장 관리인이 나와 켜 준다. 등은 에너지 효율이 좋은 LED이다.     

식당에 등은 있으나 관리인이 일정 시간에 켜준다.

가져간 컵밥 두개와 크로와상 빵 한 조각으로 가볍게 점심을 했다. 점심을 끝내고 나니 2시다. 밖은 비가 계속 오니 나가 다니기가 좀 그렇다. 방 안에서 듣는 비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정겹다. 왜? 난 비 안 맞고 있으니까. 

화장실은  10미터쯤 앞에 따로 있다. 물론 등은 없고 자연광뿐이며 수세식으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화장지도 준비되어 있다. 이곳에서 세수나 양치를 할 순 있지만 절대 비누나 세제는 사용할 수 없다. 물을 깨끗이 보존하려는 그들의 정책이다. 3박 4일 내내 함께 지내면서 비누를 사용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화장실 모습. 등은 없다.

알뜰한 한국인 네 쌍을 만나다     

3시 반쯤 되니 한 팀이 또 들어온다. 한 무리의 한국인들도 있다. 우리보단 좀 젊어 보이는 여덟 명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이 10명으로 이번 밀포드 트랙 걷기에 참여한 인원의 1/4 이상이다. 역시 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국 사람을 만난다더니 실감한다. 그들은 부부로 오클랜드에서 10인승 차를 빌려 4주 예정으로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텐트에서 잠자고 직접 해 먹으면서 일인당 500만 원 정도 쓰고 있다고 한다. 참 알뜰한 사람들이다. 이렇게 모임을 꾸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평소 함께 다니던 사이란다. 한 여자애는 대학 4학년인데 엄마 대신 왔다고 한다. 아무튼 부러운 사람들이다. 저 나이에 함께 다닐 수 있는 이웃이 있다는 것이. 

클린턴 산장의 전경

이제 산장에 올 사람들은 다 온 것 같다. 비는 세기를 달리하며 계속 내린다. 6시에 국밥 두 개와 빵으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이 되니 비는 그치고 맑아진다. 내일이 꼭 이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상예보를 무시하기엔 너무 잘 맞추니 걱정이다.     


밤새 꺼이꺼이 우는 새     

산장 관리원이 8시 무렵 식당에 다들 모이게 하더니 상황 설명을 한다. 비는 오다 개다 한다. 처음 듣는 다양한 새소리가 들린다. 한 마리가 방 주위를 돌며 꺼이꺼이 소리를 낸다. 이중엔 키위(Kiwi) 소리도 있단다. 키위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야행성 새이다. 그래서인지 뉴질랜드 사람을 키위라고도 한다. 이 새의 특징은 날개가 없다. 천적이 없어서인지 날개가 퇴화해 걷기만 한다. 그래서 보호받지 못한 지역에선 거의 멸종하고 있어 보호하고 있다.      

창문 하나가 열려있다. 찬바람이 들어온다. 누구도 닫지 않는다. 견딜만해서인가? 통풍이 필요해서인가? 잠시 후 누군가 창문을 닫았다. 그렇지. 추웠겠지. 여기저기서 코 고는 소리가 나고 밖에선 새들이 울부짖는다. 10시가 되니 내 위에 있는 채광창이 어두워진다. 한 마리가 방 밖을 돌며 계속 운다.

키위같이 생긴 새가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헬리콥터로 건너다     

밤새 비가 퍼부었다. 내일도 이렇게 내리면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 계곡 건널 일이 있다면 그건 불가할 것이다. 다음 날 아침 7시 20분까지 아침을 먹고 떠날 준비를 모두 마쳤다. 그러나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7시 50분쯤 폭우에 대한 잠깐의 설명이 있었고 8시에 대부분 함께 출발했다. 비는 조금씩 오고 있다. 양쪽 높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폭포들이 절경이다. 이런 모습은 비가 오기 때문에 더 잘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세상일에 무조건 나쁘고 무조건 좋은 일은 없지 않은가? 

사방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급류

2미터 폭의 급류를 넘지 못 하다     

12시 무렵 넓은 평지에 지붕이 있는 대피소 같은 것이 보였다. 프레이리(Prairie) 쉼터이다. 잠시 쉬던 중 장대비가 쏟아진다. 멈출 것 같지 않아 그 비를 맞으며 계속 걸었다. 조금 걸으니 버스 스톱(Bus Stop)이라고 적힌 쉼터가 또 나온다. 아니! 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또 쉼터를 지었지? 하는 의문이 곧 풀렸다. 버스 스톱을 지나고 5분 후 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형성된 폭 2미터 정도의 급류가 나왔다. 그 물길이 하도 세어 건너가지 못하고 다들 서 있다. 조금 전 폭우가 내리기 전에 일찍 도착한 일부 젊은이들은 건너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나이 많은 사람들만 있었다. 주변을  돌아봐도 도무지 건널 방법이 없자 다시 버스 스톱으로 와서 대기하였다. 그래서 이름도 재미있게 버스 정류장이라고 붙였나 보다. 

이 급류 때문에 헬기를 타다.

난생처음 타 본 헬리콥터     

건너에 있는 산장 관리원이 연락이 되어 오기로 했다고 한다. 1시간이나 지난 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버스 스톱에 모였다. 이 급류를 혼자서 건너온 그녀는 모두 안전하게 건너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나 보다.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더니 헬리콥터로 다음 숙소까지 이동하다고 말하며 헬기를 탈 수 있는 프레이리 쉼터로 다시 내려가자고 한다. 헬기는 우리보다 하루 먼저 온 등반객을 먼저 다음 숙소로 날라주고 오는 바람에 우리는 쉼터에서 근 1시간을 또 기다린 후에야 헬기에 나누어 타고 오늘의 숙소인 민타로 산장(Mintaro Hut)에 도착했다. 한 번에 여섯 명씩 타고 짐은 따로 보내왔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지 각 산장마다 헬기가 내릴 수 있는 곳이 있다.

우리를 실어 나른 소형 헬리콥터

민타로 산장은 해발고도 600미터 정도에 있다. 오늘의 예정 거리는 16.5킬로미터이지만 헬리콥터로 이동하는 바람에 14킬로미터 정도 걸은 것 같다. 비록 2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걷지는 못 했지만 생전 처음 헬리콥터를 타는 행운도 누렸다.      


반가운 화로 주변에 모이다     

마침 화로가 피워져 있어 젖은 신 등을 말릴 수 있었다. 일찍 나와 물이 불기 전에 그 산에서 내려온 물을 건너간 사람들이 피운 것 같다. 여기 숙소는 2층이며 2층은 좀 어두웠다. 채광이 침대 위가 아닌 앞에 있기 때문이다. 1층엔 두 개의 방이 있어 이층 침대가 각 3개씩 배열되어 있고 2층엔 1층 침대와 2층 침대가 섞여 있다. 조금도 쉬지 않고 비는 계속 온다.     

점심과 저녁을 겸하여 4시쯤 컵라면과 비빔밥 그리고 빵을 먹었다. 몇 시간째 똑같은 굵기로 비는 힘껏  쏟아붓는다. 폭우(heavy rain)라는 기상예보를 실감 나게 한다. 10시쯤 모두 잠에 들었는지 조용하다. 그야말로 눈앞조차 아무것도 안 보인다. 정말이지 새까만 밤을 맛보는 것 같다. 아파트에선 주위가 훤해 한 번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밤을 지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화로 주변에 모여든 신발들

밀포드 트랙을 발견한 맥키논     

지난밤에도 밤새껏 장대비가 왔다. 다음 날이 되었음에도 쉬지 않고 굵은 비가 계속 내린다. 오늘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걱정된다. 우리 한국인들 빼고 모두 출발했다. 우리도 7시 반쯤 출발했다. 굵은 비는 아니지만 비는 계속 내린다. 그나마 다행이거니 하고 걷는다. 오늘 해발고도 600미터 지점에서 1000미터 지점에 있는 맥키논 고개(Mackinnon Pass)까지 올라가고 다시 내려와야 한다. 나흘 중 가장 힘든 구간이고 어제 헬기로 탐방객을 나른 구간이라 또 헬기를 타야 되나 하는 걱정도 앞선다.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데 사방이 다 절경이다. 사진보다는 동영상이 더 어울린다. 수 백 미터씩 떨어지는 수 십 개의 폭포들. 비가 와서 더욱 절경이다. 이 계곡을 클린턴 계곡이라 부른다. 산이 높아 지그재그로 길을 따라 올라갔다. 높은 지대라 바람은 불고 추워 손이 시렸다. 1시간 반쯤 지나니 웬 십자가가 있다. 맥키논 기념비이다. 바로 뒤 고갯마루가 오늘 오를 최고의 높이이며 맥키논 고개의 정상으로 해발고도 1154미터이다. 오직 올라왔듯이 이제는 오직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바로 아래에 쉼터가 있어 들렸다. 고맙게도 가스레인지가 있어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시며 시린 손과 속을 풀 수 있었다. 이곳의 화장실은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데 아쉽게 이용할 필요가 없었다.      

뉴질랜드 정부의 후원으로 테 아나우 호수에서 밀포드 사운드에 이르는 일명 밀포드 트랙을 1888년 10월 16일 맥키논(Quintin Mackinnon)과 미첼(Earnest Mitchell)이 탐험하여 처음으로 발견했다. 맥키논은 자신이 발견한 이 길의 첫 번째 안내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892년 맥키논은 탐험 중 테 아나우 호수에 빠져 실종되었다. 이 고개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 맥키논 고개로 부르고 100주년 되는 1988년 10월 16일 그 두 사람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테 아나우에서 밀포드 사운드에 이르는 길을 발견한 맥키논과 미첼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1988년 세운 기념비

19세기 말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방문하자 길을 더 확장 필요가 생겼다. 샌드후라이부터 써더랜드 폭포(Sutherland Falls)까지 죄수들을 이용해 건설했으나 2년에 겨우 2킬로미터의 길을 만들었을 뿐이다. 이후 죄수 대신 노동자들을 고용하면서 아다 호수(Lake Ada) 주위 바위를 부수는 힘든 작업 끝에 1898년 완성했다고 한다.     


사방이 모두 폭포 천지     

다시 내려가는 데 곳곳에 있는 여러 개의 폭포 물을 건너야 했다. 심하게 비가 오면 건너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우리가 건너가는 데 위험한 곳은 없었다. 한참 내려오는데 물이 범람해 건너기 위험하니 인근에 있는 퀸틴 쉼터(Quintin Shelter)로 오라는 말이 쓰여 있다. 그곳엔 이미 몇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쉼터 앞에는 방금 전 내려오면서 보았던 580미터 높이의 써더랜드 폭포 아래로 가는 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 역시 안내인과 함께 등산하는 사람들이 묵는 곳이다. 좋은 이층집으로 잘 지어졌다. 많은 비용을 내고 패키지로 온 그들은 우리처럼 음식을 갖고 다닐 필요도 없이 해주는 음식과 좋은 잠자리를 제공받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잠시 후 젊은 청년이 오더니 이제 건너갈 수 있다며 가라 하기에 출입을 경고하는 줄을 넘어 내려갔다.      

사방이 이와 같은 폭포를 이루고 있다.

내려오는 내내 절경을 맛보았다. 위에서 보는 거랑 아래에서 올려보는 거랑 또 다르다. 도대체 건너기 위험하다고 경고한 곳이 어딘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옆에는 폭포의 물을 받은 강(Roaring Burn River)이 그 이름을 무색하지 않게 하려는지 넘실대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흘러간다.     


번개는 없고 천둥만 요란     

잠시 후 덤플링 산장(Dumpling Hut)이 모습을 나타냈다. 해발고도 120미터쯤 된다. 이때가 1시 반이니 이곳까지 14킬로미터를 6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걸은 셈이다. 우리는 중간 앞으로 먼저 도착한 셈이다. 빈 침대가 많이 있어 마음에 드는 침대를 선점하고 짐을 풀었다. 옷을 갈아입고 점심을 먹고 나니 두시 반이다. 식당은 방과 떨어져 있고 미리 온 사람들이 불을 때고 있었다.

덤플링 산장에서 올려다 본 모습

비는 계속 온다. 내일은 폭우가 아니고 산발적인 비(rain shower)가 온다고 예보하니 기대된다. 오늘 밤만 지나면 따뜻한 잠자리와 샤워가 기다리는 곳으로 갈 수 있다. 한 호주 할머니가 아내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상황을 말해주는 배려를 한다.     

3시 반쯤 되니 일행이 모두 다 도착한 것 같다. 비가  또다시  쏟아붓는다. 여긴 천둥만 치고 번개는 안 치나 보다. 한 번도 번개를 본 적이 없다.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것 같다. 내일만 좀 봐다오. 7시에 저녁을 끝냈다. 하루에 두 끼 먹기도 해 낼 아침 먹고도 세 개나 남는다. 비가 억수로 온다. 도시에 이와 같이 비가 내렸으면 분명 홍수가 났을 것이다. 낼 아침도 출발할 때는 폭우라는 기상예보인데.


물 웅덩이를 만나다

비가 정말 많이 온다. 생전 이렇게 많은 비가 이처럼 세차게 온 것은 처음 본다. 오늘은 산발적으로 비가 내린다고 했으니 정말 예보대로 해주면 좋겠다. 이제는 비가 안 오는 것을 바라지 않고 좀 약해주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출발하려는 이 시간까지 기상예보대로 비는 쏟아진다. 8시 되어서 산장 직원이 가도 좋다고 한다. 단 물이 깊은 곳이 있으니 조심히 건너라라며.     

조금 시간이 지나니 기상예보대로 비가 좀 한산해졌다. 가는 길은 매우 평탄했다. 고도 125미터에서 바다까지 가니 평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높진 않으나 지금까지 겪지 못한 오르내리는 곳이 자주 나타났다. 보이는 경치는 늘 보던 거라 식상하기까지 하다. 비는 심하지 않으나 계속 내린다. 어느 곳이 위험한 구간인가 보았더니 큰 웅덩이가 나온다. 앞서 가던 키 큰 유럽인이 건너는데 그의 무릎 위까지 물에 잠긴다. 나도 무릎 위까지 잠겼으나 키가 작은 아내는 허벅지까지 잠긴다. 허지만 짧은 구간이라 별 어려움 없이 나왔다. 참 이 사람들도 중국인 못지않게 과장이 심한 것 같다. 하긴 늘 안전을 우선 꾀하는 것이야 좋지만.

물 웅덩이. 아내의 키가 제일 작아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어디까지 물이 찾는지.

식량이 줄어들어 분명 배낭의 무게가 줄었어야 하는데 오늘이 가장 무거운 것 같다. 왜? 어깨가 아픈 것을 느끼니까. 이유인즉 아내가 지고 있던 짐이 내게  조금씩 넘어왔기 때문이다. 엄청 큰 소리를 내며 급하게 흘러가는 강(Arthur River)을 옆으로 하고 계속  따라가니 매우 큰 호수가 나온다. 아다 호수이다. 처음 길을 만들 때 이 구간의 바위를 부수고 길을 만든 사람들은 노동자들이었다. 여기서 샌드후라이(Sandfly Point)까지 2킬로미터의 길은 매우 평탄하게 잘 나 있는데 19세기 죄수들이 만들은 것이다.     

18킬로미터의 길을 5시간 걸려 한 시쯤 샌드후라이에 도착했다. 악명 높은 샌드후라이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이렇게 이름을 붙였나 보다. 파리보다 훨씬 작은 이놈에게 물리면 그 가려움이 꽤 오래간다. 심지어 한 달 이상 간다. 그래서 안 물리게 뿌리는 약도 준비했지만 나 역시 손과 발 그리고 머리까지 여러 곳을 물렸다. 손 두 곳에선 물집도 생겼다. 긁었기 때문이다. 12년 전 이곳에서 살 때 막내가 엉덩이에 물려 한 달 이상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3박4일간 폭우 속의 등산을 마치며, 필자와 아내

2시에 출발하기로 한 배가 사람이 여럿이 모이자 먼저 떠난다. 그래서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왔다. 자금까지 그래도 젖지 않았던 엉덩이가 배에 앉으면서 다 젖었다. 배는 덮개도 없는 아주 작은 모터보트였다. 5분도 채 안 걸려 밀포드 선착장에 도착했다. 

10명 정도 탈 수 있는 보트. 5분도 안되어 밀포드 사운드에 도착했다.

너무 단가가 비싼 밀포드 트랙     

밀포드 트랙을 하려면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접 뉴질랜드 환경보전청 홈페이지에서 적어도 가고자 하는 날의 6개월 전에 예약을 하든지 아니면 퀸스타운의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상품을 사는 것이다. 전자는 3박 4일이고 후자는 4박 5일이 걸린다.     

직접 예약하는 경우 경비는 다음과 같이 든다. 테 아나우에서 테 아나우 다운스까지 가는 버스비가 25달러, 이곳에서 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가는 데 81달러, 산장에서 사흘 묵는데 하루 54달러로 도합 162달러 그리고 샌드후라이에서 5분 정도 배 타고 나오는데 47달러로 모두 1인당 315달러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0만 원 가까이 든다.     

정부가 운영하면서도 가격이 매우 비쌈을 알 수 있다. 산장의 경우 거의 아무런 편의시설도 없음에도 도시의 백패커스보다도 결코 싸지 않는 가격을 받고 있다. 특히 알량한 보트에 잠시 타고 내리는데 47달러는 바가지 쓴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세계 각국에서 이 비용을 기꺼이 들이고 찾아오니 할 말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고 세계인들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 것이 고마울 따름이다.


일찍 출발하나 마나     

퀸스타운으로 가는 버스를 찾으려 하는데 마침 우리가 찾던 버스가 거기에 있었다. 버스는 트래킹 센터를 거쳐 버스터미널로 가서 대기한다. 커피 한 잔 할까 찾았으나 터미널 내에 음식 파는 곳은커녕 커피 파는 곳도 없다. 다행히 자판기 원두커피가 있어 동전을 넣고 마실 수 있었다. 나흘 만에 맛보는 커피 맛이란!     

테 아나우에 올 때 탔던 그 회사 버스를 타고 루트번 트랙이 시작되는 디바이디드(divided)에서 다시 손님을 태우고 테 아나우까지 두 시간이나 걸렸다. 시간이 정해져 있는 버스라 아무리 일찍 도착해도 예약한 손님이 다 오지 않으니 기다릴  수밖에. 아무리 한 시간 일찍 밀포드 사운드를 출발했어도 도착은 매 한 가지이다. 역시 버스는 각 승객을 숙소 근처에 내려준다. 테 아나우에서 다른 버스로 갈아타고 퀸스타운으로 갔다. 트래킹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우리만 바로 퀸스타운으로 간다.      

7시 반 되어서야 퀸스타운에 도착해 근처에 있는 베이스 퀸스타운 백패커스로 갔다. 방은 7만 원이란 가격에 어울리게 창도 없고 엉성했다. 와이파이도 유료이다. 세상에! 젖은 옷을 모두 빨래하고 말렸다. 그런 후 식당을 찾았으나 너무 늦어 문을 거의 닫았다. 슈퍼에서 오랜만에 과일과 채소를 사고 먹지 않던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으로 퀸스타운의 마지막 정찬을 즐겼다.     


뉴질랜드 건국의 기초가 된 와이탕기 조약     

1642년 네덜란드 탐험가인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은 유럽인 중에서는 뉴질랜드를 처음 발견했으나 첫 발을 디딘 사람은 1769년 영국인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다. 그래서인지 남섬 북쪽 끝에는 조수간만의 차를 잘 이용해 바닷길을 건너야 하는 트랙에 아벨 타스만 이란 이름이 붙여있고 남섬 중부에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 아로라키(Aoraki)를 일명 쿡 산(Mount Cook)이라고 한다.     

당시 흥행하던 고래잡이의 배후기지로 뉴질랜드가 각광을 받으면서 유럽으로부터 본격적인 이민들이 들어오자 토착민인 마오리와 갈등을 빗기 시작했다. 1830년대 프랑스가 뉴질랜드를 식민지화 하려고 하자 영국 정부는 마오리 부족과 조약을 체결하도록 서둘렀다. 이를 와이탕기 조약(Treaty of Waitangi)이라 한다.     

1840년 2월 6일 북섬 베이 오브 아일랜드에 있는 와이탕기에서 마오리 부족 대표들과 영국 간 체결된 조약으로 뉴질랜드를 건국하는 기초가 된 조약이다. 다른 식민지 나라와 달리 이 조약에서 마오리들에게 토지 소유와 영국 신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조약을 통해 뉴질랜드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는 매우 보기드믄 방식으로 다른 식민지 나라들은 독립하면서 이러한 불평등 조약을 없앴으나 뉴질랜드에서는 아직도 그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급히 만들다 보니 체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3개 조항에 불과하고 조약에 사용된 영어와 마오리어 사이의 단어와 문구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커서 지금까지도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미국과 호주의 원주민과 비교하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미국과 호주에서는 그 많던 원주민인 인디언과 애버리진 족이 거의 멸종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보호구역 안에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원주민들이 정치적인 영역에 진출하는 것은 거의 꿈도 못 꾼다. 자신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던 땅을 통째로 모두 빼앗기고 학살당하고 겨우 일부만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비록 충분하진 않지만 멸종되지 않았고 자신의 언어와 문화를 지금도 누리면서 뉴질랜드의 떳떳한 시민으로서 권리를 향유하고 있으니 말이다.      

당시 최강의 제국주의 세력인 영국과 원주민이 단일 조약을 통해 한 국가를 형성했다는 역사상 유일한 점을 인정받아 1997년 이 조약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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