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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지만 진짜가 아닌 것

영화 <최악의 하루>

by 골방우주나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은희를 만났다'라는 카피는 왠지 어디서 들어본 듯하다. 낯설지만 익숙한 문장이랄까, 데자뷔를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영어 제목은 [Worst woman]이다. 직역하자면 '최악의 여자' 정도일까. 그리고 한글판 제목의 원제 또한 최악의 하루가 아닌 최악의 여자였다고 한다. 김종관 감독은 시사회에서 실수로 영화 제목을 '최악의 여자'로 부른 해프닝도 있었다고 한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처음 본듯한 카피와 '최악의 여자'가 만나서 줄 수 있는 영화의 느낌은 처음엔 약간은 특이할 것 같은 연애담이었다.
막상 영화를 보니 '나쁜 여자'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담고 있기는 하다. 확정할 수 없는 애매한 것이 영화를 타고 흐른다. 중심으로 전개되는 은희를 타고 말이다. 극 중 은희는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유독 거짓말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지금 허구로 꾸며진 영화를 보고 있다. 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던지는 것을 보면 홍상수 감독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홍상수의 메시지와는, 그런 표현 방식과는 다르다. [최악의 하루]에선 거짓과 진실, 관계, 시선의 차이와 소통이라는 여러 가지 키워드가 영화에 묻어난다.
영화는 긴 호흡으로 느지막이 흐르면서 여유 있게 자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들을 내놓는다. 전체적으로 가벼운 대사들로 꾸며진 영화의 느낌은 편안하게 보게 된다는 점에서 우디 앨런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러나 홍상수와 비슷하게 분명 최악의 하루는 '우디 앨런식'은 아니다. 영화를 보고 전달받은 것들 중 일부가 유사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특이한 이야기를 가진 단순한 로맨틱 코미디 정도를 기대하고서 보았는데 보다 특별한 생각을 만난 느낌이다.

'양 다리?'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은희가 '최악의 여자'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홍상수식 표현을 빌리자면 '누구의 애인도 아닌'듯하다. 그래도 은희는 두 남자, 현오와 운철에겐 나쁜 여자다. 어느 쪽도 확실히 하지 않은 채 연애를 '유예'했기 때문이다. 또 은희는 말버릇처럼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배우라는 그녀의 직업 정신(?)으로. 두 남자에게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대상이다. 찌질하더라도 자신이 걸친 영역이 확고한 현오와 운철이다. 현오는 자신의 일이 은희와의 만남보다 중요하고 운철은 전 부인과 재혼한다. 돌아갈 곳이 있는 두 남자는 은희의 길에 잠시 동행하다 떠나간다. 금방 들통나버리는 은희의 거짓말처럼 현오와 운철도 지나가는 타인들에 불과해져버린다.
언성을 높이던 두 남자는 갑자기 '술이나 마시러 가는' 것에 상호 동의하고 산을 내려간다. 은희가 있는 길에서 벗어난다. 그들이 떠나는 것은 은희가 그들을 떠나보내거나 그들과 한 대화만큼이나 가볍다. 적어도 두 남자에게 은희는 양 다리를 걸친 나쁜 여자로 판단이 되고 상처(?) 받은 두 남자는 술이나 마시러 가버리니 말이다. 이때 은희의 무게는 더없이 가벼워진다. 어둠이 내려앉은 남산의 벤치에 앉아 홀로 독백을 하는 은희의 모습은 '극적'이어서 진짜이지만 무게가 없다.
은희의 무게는, 정체성은 타인으로부터 형성된다. 그녀는 거짓말로 먹고살아서 그녀를 둘러싼 모든 정보가 거짓 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를 설명하는 것은 어떤 정보에 근거를 둔 타인들과의 관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이 그녀를 보는 시선이 그녀의 무게를 잰다. 그리고 두 남자에게 그녀는 더 이상 잡아둘 수 필요가 없는 풍선이 되어버린다. 은희가 홀로 독백하는 모습이 마치 넓은 하늘을 홀로 나는 풍선의 모습 같았다. 그녀는 자유롭고 애를 쓰고 있지만 한없이 가볍다.

가벼운 걸음을 위한 산책로에서 펼쳐지는 가벼운 것들의 향연을 치고 들어오는 료헤이의 약간은 낮은 중저음 톤의 일본어는 전체적인 톤과 대조적으로 배치된다. 그가 인터뷰할 때 급격히 사라지는 인터뷰어(기자)나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점을 볼 때 그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다. 혹은 다른 세계에 걸친 사람. 감독의 역할을 대신하는 역할이라기보단 일종의 페르소나와도 같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 자세히 질문하는 기자의 질문에 말하는 그의 답처럼.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료헤이는 은희와 대화할 때 영어를 사용한다. 한글도, 일본어도 아닌 영어를 말이다. 둘에게 익숙하지 언어를 사용해야만 한다. 서로의 언어는 인사말조차 혼동스럽기 때문이다. 제 자리가 아닌 어설픈 영역에서 서로는 소통한다. 눈치와 몸짓을 섞어가며 말이다. 소통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대화하기 때문일까 둘의 이야기는 느리지만 구석구석을 채워가며 오간다. 다른 목적들이 난무하던 현오와 운철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은회와 료헤이가 영어를 사용함으로써 대화의 언어에 객관성을 부여하게 된다. 돌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할 수도 없다. 그리고 거짓말도 할 수가 없다.
료헤이는 은희에게, 은희는 료헤이에게 나쁘지도, 나쁠 수도 없는 사람이다. 객관적인 대화를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로 인해 은희는 새로운 길을 갈 용기가 생긴다. 한없이 가볍게 날아가던 그녀의 정체성은 다시 무게를 찾아 밤공기와 함께 내려앉는다. 그녀는 료헤이에게 자신도 걸어보지 못한 길을 걸어보자고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니까요. 여자 주인공은 꼭 행복해질 거예요

라고 은희에게 말하는 료헤이의 말은 힘을 돋우기보다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진한 커피를 마시고 각성하여 다른 이들이 원하는 '진실'에 맞게 살아야 하는 은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은희의 하루는 료헤이와의 산책으로 특별한 하루가 된다. 또한 은희의 기분을 좋게 한건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된, 동화에 나오는 상상만 가능할 듯한 시구절이다. 은희와 마찬가지로 거짓말로 먹고사는 료헤이와의 우연한 만남이 그녀를 특별하게 만든 것이다. 그녀는 우연찮은 만남에서 더 이상 '최악의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하루는 '최악의 하루'가 아니다.
그렇게 영화는 천천히 마무리를 지어낸다. 느지막이 흐르지만 말의 양이 가득 찬 영화였다. 대사만이 아니라 몸짓, 눈짓, 표정을 넘어 공간까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도 남은 시간의 공백을 채운 것은 관람자의 생각이었으리라. 영화를 보는 동안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매 장면에 의문이 담겨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나 어쩌면 이마저도, 의뭉스러운, 거짓으로 가득 차 보이던 연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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