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언어의 정원>
[언어의 정원]의 일어 제목은 言の葉の庭(코토노하노니와)이다. 언어, 말을 뜻하는 言葉(코토바)의 글자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 言の葉(코토노하)를 썼다.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자면 萬葉集(만엽집)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겠다. 만엽집은 일본의 고대, 4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가곡을 담은 가집이다. 일본인들에겐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자 문학 작품으로 여겨진다. 萬葉集(만엽집)이라는 이름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필자는 '잎(시나 글이 쓰인 한 장)이 가득한 모음집'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언어의 정원]에서 '언어'를 의미하는 言の葉(코토노하)는 다른 의미로 わか(和歌)(와카, 가곡)라는 것을 표현한다. 즉 言の葉の庭(코토노하노니와 : 언어의 정원)은 만엽집이 의미하는 잎(마음을 담은 언어)들이 가득한 '정원'을 의미한다.
극 중에서 공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유키노와 타키오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자신을 피신하는 곳이기도 하고 서로를 만나는 곳이기도 하다. [언어의 정원]이라는 제목은 두 인물이 나누는 교감을 상징하는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신주쿠 공원이라는 실제 지명이 있는 곳이지만 (그리고 유사하게 표현되었지만) '언어의 정원'은 두 인물에게 단지 공원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타키오는 자신이 고등학생이고 구두 직공이라는 현실적이지 않은 직업을 꿈꾼다는 것을 널리 말하고 다니지 않는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키노는 자신에 대한 질 나쁜 소문들과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워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런 상처가 가득한 두 인물이 만나는 곳이 공원인 것이다. 이처럼 공원은 두 인물에게 오직 비 오는 날의 아침에만 갈 수 있는 마음속의 피난처이다.
이런 공원을 찾는 이유는 영화 초반부 타키오의 내레이션에서 잘 드러난다. "어릴 적 올려다본 하늘은 이것보다 가까웠다"는 타키오의 말처럼 어릴 적 꿨던 꿈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15살이 되고 27살이 되니 세상은 어릴 적 하늘처럼 언제나 밝지는 않다. "스위치를 킨 것처럼 맑은 날이 계속"되듯이 모른 척 노력해도 하늘에 닿고 싶었던 꿈에 마음속 어딘가가 시릴뿐이다. 그런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하늘의 향기를 담고 내린다. 그래서 타키오는 비를 찾아, 하늘의 향기를 찾아 공원으로 향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공원에 있는 나무들에, 잎사귀 하나하나에 하늘의 향기가 스며들어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비 오는 날의 신주쿠 공원은 '언어의 정원'이 되는 것일까.
언어의 정원은 비를 맞으며 푸르른 여름의 정취를 담는다. 비 소리만이 가득해서 세상의 다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마음을 편안히 해주는 그런 공간이 된다. 정원에 내려 잎사귀 하나하나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비의 존재감이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눈으로 변화하여) 보이는 비의 묘사는 인물들과 하나 되어 아름다운 그림들을 펼쳐낸다. 또한 비는 그 자체로 타키오와 유키노의 마음을 드러내 주는 하나의 '언어'이다. 가령 타키오와 유키노가 두 번째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키노가 "어차피 인간은 어딘가 조금은 어딘가 이상한 생물이니까."라고 하자 "그럴까요."라고 대답하는 타키오의 모습 이후 갑자기 부는 반대 방향의 돌풍은 흘러내리는 형태를 통해 새로운 마음이 일어날 것이란 기대를 하게 한다. 연주곡과 함께 흘러간 장면들 중에 타키오가 "정신 차리고 나면 비가 오길 기도하고 있다."는 장면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는 비의 모습은 마찬가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타키오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둔 듯하다.
비와 빛으로 둘러싸인 안식처에서 유키노와 토키오는 다시 나아갈 준비를 한다. 두 인물의 성장은 서로에 대한 동경과 이해로 시작한다. 세상에 나서는 것이 두려운 유키노와 아직 자신이 충분히 자라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토키오는 서로를 이해하며 다시 세상으로 나아갈 준비를 한다. 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은 두 인물은 만나는 시간을 쌓인 만큼 같이 먹는 음식의 종류가 다양해진다는 것. 이는 서로가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유키노는 토키오가 만드는 첫 구두의 모델이 되어준다.
토키오가 만드는 유키노의 구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토키오에겐 자신의 힘으로 처음 만드는 구두이기에 자신의 꿈을 실현해내고 그것으로 한 발짝 다가서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꿈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던 세상에 당당하게 맞서는 자신의 첫 작품인 것이다. 유키노에게 토키오가 만들어준 구두는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돕는 것이다. 언제나 신발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고 상처투성이인 그녀의 발에서 보이듯 유키노는 혼자서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녀는 정원에서 혼자 걸어갈 수 있는 연습을 하고 있었고 토키오의 신발 선물은 유키노가 다시 용기를 되찾는 계기가 된다.
엔딩 OST가 끝난 후 타키오가 공원에 놓고 간 구두는 자신이 꿈꿨던 화려한 꿈같은 구두는 아니었다. 어머니가 선물 받았던 반짝이는 화려한 구두와 비슷한 구두 말이다. 타키오의 구두는 오히려 정갈하고 깔끔했고 잎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제 비가 아니라 눈이 내리고, 빗소리가 아니라 새소리가 들리는 공원에서 타키오는 구두를 '선물'한다. 그들을 감싸던 정원은 다시 공원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유키노와 타키오는 공원에서 떠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유키노는 타키오를 통해, 타키오는 유키노를 통해 성장한다. 세상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그들만의 공간으로 들어왔던 서로를 이해하며 성장한다. 타키오는 유키노에게 어떤 나쁜 질문을 잣대 삼아 뭐라 하지 않고 유키노는 타키오에게 잘못된 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두 인물은 서로를 통해 용기를 얻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그곳에서 나, 네게 구해진 거야."라는 유키노의 말처럼 둘은 정원에 피해있다가 갇혀버린 서로를 구원했다.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세상이 자신에게 모질게 대하거나 내가 세상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면 유키노와 타키오처럼 비 내리는 정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싶다. 후두둑하고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를 둘러싼 두려운 생각들을 떨쳐내 버리고 싶다. [언어의 정원]은 이런 생각이 들게한 영화다. 유려하게 떨어지는 비와 따뜻하게 감싸는 빛으로 표현된 치유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