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골방우주나 Sep 12. 2016

판타지의 탈을 쓴 앨리스

영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다. 바다로 나간 앨리스는 선장이 되어 [거울 나라의 앨리스]로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온 앨리스는 또 다른 의미로 예전의 앨리스가 아니었다. 전작과 비교해 볼 때, 전작에서 보여준 팀 버튼의 표현력은 사라지고 '가화만사성'만 남았다. 조금 복잡한 동화는 그로테스크함과 약간의 미친듯한 느낌을 잃어버리고선 흔한 판타지 가족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아쉽다.
 제임스 보빈 감독이 원하는 것은 이런 흔한 영화인가. 전작보다 자연스럽고 세밀한 특수효과는 넘쳐나지만 스케일에 비해 치밀함은 사라졌다. 어떤 확신도 주지 못한 채 캐릭터들은 소모된다. 거대한 CG를 보고 싶어서 보는 영화가 아니었는데 '시간-서핑'을 하는 앨리스의 모습만 기억에 남는다. 앨리스가 보여준 혹은 다른 캐릭터들이 보여준 어떤 모습들도 CG 만큼 치밀하지 못 해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무조건 같은 노선이어야 할 필욘 없지만 비슷한 걸 기대한 입장으로서는 왜 이런 방식이었는지 납득하기 힘들다.

그냥 동행일 뿐..

 전편에서 만난 캐릭터들은 그저 앨리스를 반길 뿐이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아직 신비로움을 가졌던 캐릭터들은 개성과 매력을 잃고 평평한 캐릭터가 된다. 이야기에서의 활약은 현저히 떨어지고 어느새 영화의 저 멀리에 떨어져 버린다. 애써 만든 캐릭터들은 그저 씬들을 위해 소모된다. 무언가 더 특이할 것이라, 어떤 사연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던 캐릭터들은 모두 앨리스만 바라보는 바보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앨리스가 가진 '굉장함',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심지어 그녀는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명실한 주인공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주인공만 바라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앨리스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도 초반부 앨리스를 중심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이끌다가 이내 CG에 모든 임무를 던져버린다. 제아무리 거대한 해일도 스토리 없이 화면에서 떨어지면 그저 장식품에 불과할 뿐이다. '이상한 나라'는 사연이 담긴 골동품이었다가 화려한 장식품이 되어버렸다. 112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을 치밀하게 채우는 것은 메시지에 어울리는 표현의 구석구석이어야 했다.

시간님의 보물은 시간이다. 나르시시스트

 '시간'을 의인화한 것은 흥미로운 설정이나,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한다. 그저 '시간의 파도'를 넘나드는 이상한 '크로노스피어 액션'을 보여주더니 이내 시답잖은 농담들로 시간을 채운다. 이 영화는 보여주기 위해 만든 것일 뿐이다. 어떤 메시지도 전달할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앨리스가 하는 말들로 메시지를 꾹꾹 눌러 담아 버린다. 이미 방은 화려한 장식품들로 가득 찼는데 말이다. 가득 찬 장식품들 사이사이의 공간은 적절한 요소를 찾지 못하고 지루함을 담아버렸다. 이로써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전작의 좋은 요소를 이어나가지 못한 후속작이 되었다. '전작보다 못한 후속작'의 분류에 해당한다.

엑스트라 2, 3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교훈을 얻을 수 있다."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중심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아버지와의 이야기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앨리스의 믿음이나 가족주의적 이야기도 있겠지만, 시간에 대한 이야기로 절반 이상을 다루는 것을 보면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을듯하다. 앨리스가 가진 과거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배에 대한 집착(?)과 결혼 거절로 인한 자금적 압박 정도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이미 선장이란 지위를 가지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던 앨리스의 모습을 다시 평범한 수준으로 깎아내리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 
 앨리스는 선장이 되어서 아버지의 꿈을 어느 정도 실현했다. 회사의 지분을 팔아넘기는 어머니의 행동은 설득 가능한 조건을 주지 않는다. 별난 앨리스를 못마땅히 여기던 어머니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평범하게 살도록 자금적 압박을 용인(혹은 이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에 앨리스와 함께 배를 타는 어머니의 모습은 돌연 변해버린 모습이다. 어머니는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앨리스를 인정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항해를 기다리지 않고 회사의 지분을 팔아버릴 만큼 말이다. 그러나 가족주의는 모든 것에 완벽한 대답이 되어버린다. 가족 엑스 마키나
 캐릭터들의 매력이 사라지고 가족주의로 답하는 위기의 극복은 앨리스를 조금 특이한 여자가 되도록 하고 영화를 그저 그런 영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앨리스는 충분히 꿈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믿음을 가진 여성이었다가 현재의 삶,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 어머니의 말을 듣는 효녀가 되어버린다. 물론 내가 과대해석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봤던 앨리스의 모습, 이상한 나라가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팀 버튼의 판타지 클래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