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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Oct 07. 2016

폐허 속에서 찾아낸 희망

영화 리뷰 [칠드런 오브 맨]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처음 [칠드런 오브 맨]을 접하게 된 것은 [그래비티] 때문이었다. 처음 [그래비티]를 보고서 영화의 압도적인 영상과 뻔한 레퍼런스의 아름다운 표현 등에 감명을 받았다. 자연스럽게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임마누엘 루베즈키 촬영 감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칠드런 오브 맨]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가 제작된 것은 2006년이지만 국내에 개봉을 하지 않아 DVD로 빌려봐야 했다. 그리고 최근 16년 9월 22일, 영화가 개봉했다.

 [칠드런 오브 맨]이 그리는 세계는 '디스토피아'다.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 끔찍한 현실을 담은 미래. 2027년의 세계엔 출산이 사라졌다. 아이가 사라지고 젊음은 돌아오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젊은'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남자의 죽음을 보도하는 뉴스 소리로 영화는 시작한다는 것을 보자. 얼마나 절망적인가.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세계는 허무주의에 휩싸이고 폭동이 일어나 대도시들은 무너진다. 혼란한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건 섬나라 영국이다.

임신 테스트를 거부하는 것은 범죄입니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런 흥미로운 설정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영화적 세계를 보여준다. 대낮에 사람이 납치를 당하는데도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부터 납치된 공간을 둘러싼 뉴스들의 디테일을 통해서. 문학에서 '세계의 정신을 드러내고 싶다면 세계의 모습을 재현하라.'라고 하곤 한다. [칠드런 오브 맨]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여러 레퍼런스(혹은 메타포)를 통해 드러내고 주제를 명확히 전달한다.

 세계에 아이들이 사라진다면? 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허무주의에 빠져 현실을 조소하고 이런 지옥 같은 삶을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최선인가? 내일에 대한 기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끝없는 질문들이 던져진다. 단 하나의 문제로 영화의 세계는 구성된다. 어쩌면 하나의 문제에 영향을 받은 영화 속 사회는 현재보다 조금 더 치열할 뿐 비슷한 양상을 띤다. 인종, 종교, 전쟁, 권력 사회의 모든 투쟁은 영화에서 끊임없이 폭력을 발산한다. 그리고 이런 무시무시한 폐허 속에서 단 하나의 기적이 피어오른다. 이는 기적이요, 드라마다. [칠드런 오브 맨]은 이런 SF 드라마다.

두 남자의..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세상엔 이상한 일만 일어났어요." 우습게도, 오늘을 살게 하는 것은 내일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다. 죽어가는 청각 세포의 '잉'하는 이명을 듣고 소리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테오는 그런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세상은 불임이 오기 전부터 망해가고 있었다고 제스퍼에게 단언하는 그다. 그에게 내일이란 마치 그의 생일 같은 것이다. "뭐 같은 기분으로 일어나서 뭐 같은 기분으로 일하러 갔죠"

 그러나 그는 영화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변화한다. 그 과정엔 두 인물의 죽음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바로 줄리엔과 재스퍼의 죽음이다. 줄리엔은 확실하지 않은 휴먼 프로젝트의 존재를 믿고 키를 보호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폐허가 되어버린 세상에 아직 희망이 있다고 믿는 인물이다. 또한 난민들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피시단의 리더이기도 하다. 이런 줄리엔의 죽음을 막으려 노력했던 테오는 그녀의 피(의지)를 이어받는다. 폭탄이 터진 상황에 "또 난민이나 테러 집단 짓이겠죠."라고 말하던 그가 극의 마지막엔 집시족 난민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말이다. 재스퍼의 죽음은 허무주의자임에도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허무주의자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지키고 싶은 게 주변 사람(테오)과 아이(키가 임신한)였으니.

 줄리엔이나 재스퍼의 역할은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필수적인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특이한 인물은 예술 사업을 하는 테오의 친척 나이젤이다. 망해가는 세계에서 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는 게 무의미하지 않은가. 테오의 말처럼 "100년 뒤엔 볼 사람도 없는" 예술품을 모으는 것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면 돼."라고 말하는 나이젤, 그는 또 다른 의미로 구원을 바라는 것이다. 이토록 허망한 인생에 고매한 희망을 담은 고대의 예술품이 자신의 현재를 존재케 하리라 믿는다.

 조금 더 뒤로 감아서, [In the court of crimson king]이 깔리며 나이젤을 만나러 가니 그가 아쉽게도 피에타 상은 못 구했다며 너스레를 떤다. 나이젤의 막강한 힘과 권력으로도 '피에타'는 구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피에타는 가장 힘없는 곳에서 드러난다. 바로 난민들 틈에서다. 극의 후반부 혼란의 틈바구니 속 자신의 아들을 잡고 슬피 우는 난민이 있다. 꼭 피에타와 닮은 모습을 한 채로. 기득권의 권력으로도 얻지 못한 피에타는 폐허 속에 현존하고 있다. 이처럼 [칠드런 오브 맨]에 나타난 수많은 레퍼런스와 메타포 중에서 희망적인 부분들은 모두 소외계층에서 나타난다. 가나의 자장가를 부르는 키에게서 인류의 아이가 태어난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인류 멸망을 막는 것이 전쟁이나 정치 같은 무력의 충돌이나 움직임이 아닌 광대한 범위에 걸친 사랑, 인류애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폐허의 모습을 갖춘 디스토피아를 여실히 재현해내고 그 속에 숨겨진 희망을 내세움으로써 멋진 영화적 순간을 완성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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