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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Oct 08. 2016

망설이고 헤매어 끝내 길을 잃어도

영화 리뷰 [립 반 윙클의 신부]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러브 래터]가 아닐까. "오겡끼데스까"라는, 일본어를 몰라도 기억에 남는 대사가 나온 작품이다. [러브 래터]에서 이와이 슌지 감독이 그려내는 겨울의 풍경은 세심하고 따뜻하다. 그리고 영화 [립 반 윙클의 신부]에서도 따뜻한 감독 특유의 색채가 묻어난다. 

 [립 반 윙클의 신부]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소설 원작의 작가는 이와이 슌지이다.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감독에게는 처음이 아니다. [러브 래터]의 경우가 그렇고 [하나와 앨리스:살인사건]의 경우엔 반대로 애니 영화를 소설화했다. 소설과 영화가 다루는 표현의 차이는 크다. 많은 소설 팬들과 영화팬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소설에 있는 세세한 표현들은 영화로 옮겨지면서 뭉뚱그려지거나 밋밋해지는 경우가 많다. 고된 작업이다. 그러나 이와이 슌지는 이런 작업에 힘들어하지 않는 듯하다.

 영화는 주인공 나나미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나나미가 느끼는 감정을 세세하게 나타낸다. 그래서 영화를 보다 보면 나나미에게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소심하고 소심한 성격인 나나미가 보여주는 답답한 선택들은 왜 저렇게 바보 같은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를 미워할 수가 없다. 현실의 그녀는 혼자다. 그래서 가상 세계에 마음을 내뱉는다. '플래닛'이라는 익명의 SNS에서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힘든 고민들을 불평 없이 오롯이 혼자 감내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짠'하다. 

 주변에 친구도 없고 결혼한 남편은 자신에게 관심도 없다. 시어머니는 결혼 전부터 그녀에게 일을 그만두라 압박한다. 그녀에게 그녀가 선택한 앞 길은 없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결국엔 내동댕이 쳐진다. 그렇게 그녀는 한없이 흔들린다. 영화에서 [G선상의 아리아]가 삽입되는데 묘하게 자아내는 분위기가 그녀의 흔들림이 내는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며 공간을 채운다. 그녀는 그렇게 길을 잃는다.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 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가족주의를 파괴했다는 점이다. 그녀에게 가족은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친족수가 부족해서 '가짜 친척'을 만들어 결혼식장을 채웠다. 이혼한 부모님은 그녀의 결혼식을 위해 부부인척 연기한다. 그녀에게 가족이란 명분을 위한 가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아이러니는 그녀가 '가짜 친척'이 되었을 때 발생한다. 아무로에게 아르바이트를 추천받은 그녀가 '가짜 친척'에서 가짜 딸 역할을 하는 것에 그녀는 더욱 열심히다. 자신이 결혼할 때 보다 더 열심히다. 그리고 '가짜 가족'은 헤어지기가 아쉽다.

 '진짜 가족'이 사라진 그녀에게 SNS는 유일하게 의지할 곳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얻은 얄팍한 결혼 생활에서 내쳐졌을 때, 그녀는 길을 잃는다. 현실에서 그녀는 아무렇게나 가다가 길을 잃어버린 신세다. 결혼마저도 가상의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얄팍한 현실이었다. 그녀는 가상의 공간을 헤매다, 현실을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느새 주위를 둘러보니 길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아무로의 세계에서 길을 찾고 아무로의 세계로 돌아간다.

 아무로는 네트워크를 의인화한 인물이다. 돈을 위해 타인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로는 마냥 나쁜 인물로 비치지 않는다. 네트워크의 양면성, 정보를 제공해주는 이점과 제한, 왜곡된 정보로 받은 불이익은 언제나 상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듯하다. 또한 그 정보는 쉽게 쥐어지는 것이다. 코코가 "쉽게 얻은 행복은 쉽게 부서질까 봐 나는 행복을 돈 주고 사."라고 말하는 것처럼 인터넷에서 얻은 행복은 쉽게 깨진다. 나나미는 인터넷으로 결혼을 했지만 마찬가지로 결혼을 잃었다.

 '나체의 삶'을 살았던 코코는 나나미에게 수많은 돈을 투자한다. 나나미라는 친구를 돈 주고 사고 싶었을까. 코코는 나나미에게 과한 월급을 주고 과도한 월세를 내는 생활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녀는 나나미와 같이 살 집을 꿈꾼다. 하지만 그들이 같이 사는 공간을 꿈꾸는 것은 정말 꿈같은 이야기다. 불가능한 이야기. 단순한 집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살고 싶은 삶의 보금자리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친구와 같이 살 집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아무리 행복한 결혼 체험을 해도, 코코가 안식을 얻는 것은 같이 죽어주는 방법뿐이다.

 영화의 끝에 나나미는 자신의 집을 가지게 된다. 누군가 버리고 남은 가구들을 골라서 집에 놔둔다. 햇빛이 알맞게 드는 평온한 집에 그녀가 서성이는 장면을 보라. 누군가가 버린 가구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생긴 가구들을 어루만지며 앉아보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라. 단정히 묶어 올린 머리처럼 다시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낯선 익명의 가구들에 익숙해지려 노력한다. 보금자리는 숨 막히던 그녀의 삶에 조금의 틈만 틔운다. 살아가도 괜찮다는 위로의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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