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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Oct 13. 2016

어쩌면, 기록이란 그 자체로 겸허하다.

영화 리뷰 [카메라를 든 사람]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진기가 총에 비유되듯이 누군가를 찍는 행위는 살인의 승화다." 사진작가 수잔 손탁은 자신의 저서 [사진에 관하여]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카메라로 찍는 행위라는 것이 누군가의 삶에 일부를 찍고 기록하는 행위라는 것에서 살인이라는 행위에 대응될 정도로 숭고한 행위이다. 특히 기록으로서의 영상이란 특정한 목적을 가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서 이런 숭고함은 영상 그 자체로 때로 감동을 주기도 한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미국의 여성 다큐멘터리 촬영 감독 커스틴 존슨이 25년간 촬영한 영상을 모아 편집한 영화이다. 2016 DMZ 국제 다큐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었고 국내에서 다른 방법으로 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상영일정(국외)

 여느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연출에 빈 공간을 두고 그곳을 관객들의 생각으로 채우고 싶어 하는 듯하다. [카메라를 든 사람]을 보다 보면 커스틴 존슨이 가진 직업 정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녀가 찍어온 모든 상업적 영상들과 모든 비상업적 영상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양 떼의 모습부터 치매에 걸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까지 카메라는 광대한 영역을 찍어낸다. 그리고 이 카메라가 찍는 곳은 분명 실재하는 어느 시점의 어느 장면이라는 점에서 그것의 무게감을 더한다. 현실이 주는 무게는 매끄럽게 쓰인 소설이 따라갈 수가 없다.

 그것이 바로 [카메라를 든 사람]이 주는 강력한 이야기다. 어떤 매혹적인 이야기도 일상만큼 우리에게 와 닿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커스틴 존슨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보여줄 뿐이다. 그녀는 단지 찍음이라는 행위를 행하는 사람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다. 그래서 보여준다. 그 시간을 그녀가 경험하고 있는 그 느낌을 찍어서 보내준다. 영화에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교차되기도 하고 서로를 넘어 들기도 한다. 첫 문장 인용구처럼 '살인의 승화'인 '찍음'으로써 찍히는 대상의 모습을 담는다. 대상이 가진 시간의 일부를 담는다.

  대상이 가진 시간의 일부를 담는다는 말을 깊게 파보자. 우리는 카메라로 타인을 찍을 때 그 시간에 존재하는 타인의 모습을 찍는다. 빛을 담은 타인의 모습이 카메라의 렌즈를 통과해 기록된다. 그리고 '찍는' 기록은 대부분 타인의 기록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대부분 카메라에 담기는 빛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촬영은 타인의 삶을 바라보는 행위가 된다. 또한 타인의 삶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대응되는 작업이다. 그들의 생을 조금 떼어내어 빛을 매개로 담는다. 그렇게 카메라를 든 사람은 타인의 삶을 일부를 지켜본 경험을 공유한다.

 다큐멘터리의 중간중간 '관음증'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발언들이 나온다. 커스틴 존슨 감독이 가진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그중에서도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한 영상이 기억에 남는다. 꽤나 멀리 떨어진 두 입자를 양자 상태에 두고 두 입자 모두 특정한 상태에 있도록 할 때, 한 입자에 가해진 자극에 대한 결과가 멀리 떨어진 다른 입자에서도 동시에 나타난다는 게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한 설명이다. 쉽게 말하자면, 떨어진 두 입자가 특정한 상태에 있다면 한 입자의 변화와 동시에 다른 입자의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세계란 그렇게 멀리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다. 세계는 어딘가 이어져있다.' 그녀는 자신이 보아온, 25년의 시간을 찍어온 세계가 어딘가 이어져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는 영상의 단순한 나열 너머에 있다. 그리고 그녀의 영상은 멀리 떨어진 한 입자의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것을 보는 우리는 다른 한 입자 앞에 있다. 그녀의 영상은 대상을 보는 그녀와 관객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 작용하는 것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가졌던 시간과 관람을 하는 사람의 시간이 이어진다.

 '연결'은 어떤 부분에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너무나 머나먼 공간에 있는 어떤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때론 그녀의 카메라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잡으려는 듯했다. 사람이 없는 곳을 찍으며 공간과 교감하려고 노력한듯했다. 그리고 사람을 찍을 땐 사람에게 집중했다. 사람이 나오는 각도와 사람의 눈짓 몸짓을 모두 담는 아름다운 진심을 담아 촬영했다. 떨리는 손에서 이어지는 미묘한 떨림은 울림으로 바뀌어 진심을 담는다. 관계 속에서 영상은 진심이 된다.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벅차올라 버린 후에야 그런 영상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영상들은 더 이상 '관음증'이 아니었다. 조용히 지켜보는 것은 관음증을 넘어 쾌락의 무언가의 너머에 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든 사람]에서 나오는 영상들, 몇 초간의 정적과 검은 바탕에 간략한 위치를 표시하는 화면이 지나고 이어지는 롱테이크의 영상들은 그대로 영화가 되었다. 강력한 법칙들도 고려되지 않았지만 '찍음' 그 자체로 삶이 되었다. 25년 간의 커스틴 존슨이 살아온 촬영 인생을 겸허하게 지켜보자.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는 그녀의 삶의 기록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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