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뷰 [스위스 아미 맨]
돌연 선댄스 영화제에 나타난 '화제의 문제작'은 몇몇 관객들에게 불쾌감을 줘 불편한 관객들이 퇴장한 이례적인 역사를 남겼다. 퇴장을 유발한 불쾌감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 영화의 주요 설정이었다. 극 중에서 다니엘 레드클리프가 맡은 역할은 '시체'인데, 그것도 방귀를 계속 뀌는 시체이다. 이에 영화의 초반부의 대부분은 '방귀 사운드'로 가득 차 있는데 이에 모멸감을 느낀 관객들이 자진 퇴장한 것. 또한 영화의 주인공 행크와 매니는 사람들이 침묵하는, '암묵적 금기'의 여러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방귀가 그 첫 번째이고 성욕이나 자위, 동성애 등 여러 요소가 등장한다. 심지어 시체를 마구 사용(?)하는 것이 영화의 주요한 소재이다.
이 독특한 영화는 선댄스에 소개되자마자 '화제의 문제작'이 되었다. 그러나 '영화적으로' 보자면 개성 있는 미장센, 유려한 카메라의 움직임, 생생한 색감까지 [스위스 아미 맨]은 매력적인 영화다. 꽤나 괜찮은,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스위스 아미 맨]은 이미 '불쾌감', '문제작'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잘 불쾌함을 유발하는' 영화일까? 혹은, 정확히 말하자면, 불편한 주제들을 다루는 영화일까.
이 영화에는 일상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말하기 힘든 것이 가득하다. 친근하지만 공론화하기 힘든 이야기가 주요한 소재이다. 불편한 주제는 몇몇 관객들에게 다소 불쾌할 수 있다. 그러나 [스위스 아미 맨]은 자신들만의 코드로 '암묵적 금기'들을 풀어낸다. 코드의 중심에는 [스위스 아미 맨]이라는 적절한 이름이 있다. 제목이 왜 '스위스 아미 맨'일까? 영화의 제목은 '만능 도구'인 스위스 아미 나이프에서 따왔다. 그리고 '스위스 아미 맨'-매니는 행크의 생존을 돕는 만능 도구로 사용된다. 또한 여러 금기들을 건드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체인 매니를 도구로 사용하며 행크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탄탄한 시나리오로 영화로 재현된다. '암묵적 관습'을 두드리는 영화의 방식은 희극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하다. 영화가 이야기하기 힘든 것들을 코믹하게 풀어낸 덕분에 관객은 무겁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영화는 적절한 은유와 비꼬기를 통해 극적인 설득력을 담는다. 그렇게 [스위스 아미 맨]은 유쾌하게 금기와 관습을 타파하고 일상을, 우리의 가까이에 있는 '문제'들을 되돌아보게끔 한다. 불편한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다.
우선 이 영화를 '시간증을 가진 자폐증의 시각적 재현'이라고 단정 짓지는 말자. 행크는 매니의 육체에 대해 성적으로 집착하지도 않고 완전히 자폐증을 가진 정신병자가 아니다. 행크에게 매니는 마치 척의 윌슨([캐스트 어웨이])과 유사한 존재이다. 극의 후반부에서는 매니가 행크를 이끈다는 점에서 '윌슨'보다 더욱 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해낸다. 매니는 행크의 자의식이 만들어낸 '행크의 세계'에 속한 또 다른 주체이다. 그리고 그 역할은 마치 좀비 같은 시체에게 맡겨졌다.
영화의 후반 위 사진의 'What the fuck?'이 등장할 때쯤에 행크와 매니는 '현실 세계'로 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행크 월드'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이때 영화의 인물들이 행크가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장치와 인형, 구조물 등을 발견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는 그 전의 장면들이 모두 '행크 월드' 안에서 일어난 행크의 시선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런 방식의 시점 교차를 통해 영화는 행크의 시선으로 모두를 몰입시켰다가 돌아와 행크를 바라보는 시선을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행크라는 '루저'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준다.
뒤통수를 강하게 때린 듯한 느낌이었다. '행크 월드'에서 보여줬던 모습에 흠뻑 빠져있었다가 갑자기 외부의 시선으로 돌리니 영화에 순간적으로 거리감을 느꼈다. 롱 테이크를 통해 경찰과 방송국이 도착한 모습을 보여주는 씬은 극 안의 현실감을 부여하고 극 밖의 거리, 관객과 극의 거리를 만들어냈다. 롱 테이크 씬 이전의 행크가 갑작스럽게 낯설어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연출이 주는 괴리는 '행크 월드'에 대한 경험과 그것을 바라보는 편견을 대치시킴으로써 극적인 대조 효과를 준다. 그렇게 간접 경험이라는 영화적 효과를 완성하고 객관성을 얻는다. 이후 방귀의 반복으로 이어지는 코믹한 마무리까지 [스위스 아미 맨]이 보여주는 짜임새는 섬세함이 돋보인다.
짜임새 안의 내용을 살펴보자. 행크라는 루저가 바라보는 세계란 어떤 세계일까. 집에서 달아나 세계의 영역을 벗어나고 싶었던 행크가 향하는 곳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이고 하려던 것은 자살이었을까. 루저가 이 세상에서 머물 곳이란 없을까. 'Weird(이상한)'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안 하는 것을 해서 놀림받는 것'이라는 행크의 설명이 그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그는 세상의 특이점이 되는 것이 두려운 '루저'다. 평범하지 않아 핍박받는 것이 두려운 사람이다. 이런 행크의 두려움을 깨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백지 같은 매니다.
행크는 지식이 백지가 되어버린 매니에게 여러 가지를 설명해준다. 집, 성욕, 버스, 사랑 등 여러 단어들에 대해 설명한다. 매니는 행크가 자신에게 일상과 '좋은 삶'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듣고 이들을 이어서 하나의 가치관으로 묶어낸다. 행크는 아무렇지 않게 솔직하게 말하는 매니의 모습을 보며 이룰 수 없었던 것들을 매니를 대역으로 이룬다. 매니는 행크가 말 걸지 못했던 여자에게 대역으로 말을 건다. 그리고 마지막엔 행크가 말 걸 수 있게 행크를 세계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쁘지 않잖아?" 행크는 자신의 알을 깨고 나아간다. 매니가 행크의 알을 깨는 '도구'가 된다.
죽은 시체인 매니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다. 행크는 매니에게 자신이 하지 못한 일들을 함으로써 사랑을 만들어주고 세상에 대한 추구를 끊이지 않게 한다. 이에 매니가 던지는 세상에 대한 질문은 순수하면서도 날카롭다. "너와 내가 몸을 맞대고 있지만 무언가 가로막힌 느낌을 준다"거나 "친한 친구가 내 앞에서 방귀를 숨긴다면 또 무언가를 숨기는 걸까?"라는 물음은 암묵적 관습에 대한 솔직한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통해 매니는 관습에 눌려왔던 행크를 해방한다. 관계의 단절에 직면한다.
"모두들 조금씩 못났어, 모두가 조금씩 못났고 무용하더라도 만약 한 명이 나서서 그걸 인정한다면 모두들 춤추고 노래하고 방귀를 뀌어서 모두가 덜 외로워할 거야."라고 말하는 매니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스위스 아미 맨]은 딱 이런 영화다. 우스꽝스럽더라도 나의 못났음을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진정을 다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암묵적인 관습을 타파해서 '자위를 하면 일찍 죽는다'와 같은 왜곡을 없애고 조금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세상을 위해 [스위스 아미 맨]은 '완벽한 도구 같은'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