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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Nov 01. 2016

삶의 언젠가, 멀어지고 다가오는 것들

영화 리뷰 [다가오는 것들]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언어의 매력은 자유로움에 있다. 그것이 어떤 모양새를 갖추면 하나의 의미를 표방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어느새 '갖춰진' 모양새란 없다. 글자의 모습은 그대로지만 의미는 변해있다. 그래서 글은 다시 읽을수록 아름답고 시는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고들 하는 걸까. 글자는 그 자리에 모양새를 갖춘 채 그대로 있지만 읽는 이는 그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도 제 멋대로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그 사이 미묘한 중심을 잡은 채 의미의 사이를 뛰어다닌다. 이 뜀박질은, 돌아보는 순간, 다른 '시선'으로 남는다.

 시간이 흐르고 시절을 지나 시대를 살다 보면 '한 때'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온다. 아름답다고 자부하던 시간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시간들'은 흐르는 것이다. 마치 글자와 글자처럼 흐른다. 시간은 '흐른 채', 흐르던 때의 모습을 간직한 채 또 유유히 흘러간다. 우리는 다만 그 흐름 속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앞뒤를 재며 길이와 상하를 판단하고 그곳에 아름답다는 말을 가져다 붙인다. 아름다웠다, 아름답다, 아름다울 거다. 그리고 마침내, 아름다움 마저도 표류한다.

  프랑스의 영화쟁이들은 삶에서 느낀 아름다움을 영화에 담아내려고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일상'을 찍는다. 표류하는 '아름다움'이 언제나 삶의 평편한 곳 어느 곳에서도 이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다만 영화는 아름다움을 표방하지 않는다. 다만 일상을 찍고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은 '찍히지 않는 것'이 아닌 관객에게 '찾는 것'이 된다. 각자의 의미에서 영화는 힘을 얻고 기억의 한 자리를 잠시 빌린다. [다가오는 것들]은 그렇게 기억의 한자리에 남는다.

 어쩌면 별 이야기할 것도 없는 영화다. '50대 여성 철학교사의 무너지는 삶에 대한 고군분투'라는 말로 압축 가능한 이야기니까. 사랑하는 이와의 작별, 떠나가는 아이들, 한 때 빛났던 하지만 위태로운 철학 교사라는 직업까지 여러 가지 문제를 던지자면 던질 수 있고 이 영화 또한 그렇게 볼 수 있다. '아 힘들겠네, 상황이 저러니 말이야.'하는 동정 섞인 한숨으로 끝날 영화일 수도 있다. 만약 이런 평을 내렸다면, 찬찬히 시를 곱씹듯, 이 영화를 곱씹어보기를 바란다. 삶의 전반을 잃어가는 그녀에게 왜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제목을 선물했는지부터.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 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영화는 찬찬히 그녀의 '일상'을 조명한다. 무너져가는 일상은 느린 움직임으로 그녀를 덮친다. 그녀는 마치 한단씩 한단씩 어긋나 무너져내리는 탑에 덮쳐지는 사람 같다. 그러나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다. 언제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옳은 것과 마음을 두어야 할 것에 고민하는 철학교사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녀는 무너지지 않는다. 혹은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고 애쓴다. 아이들도, 엄마도, 남편도 없으니 "난 이제 완전히 자유로워!"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길을 잃어가지만 아직 그녀 자신을 잡고 있다. 어쩌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길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인용된, 파스칼이 자신의 저서 [팡세]에서 적은 구절이 그녀에게 손길을 내밀어 줄 것이다. '영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라는 구절이 "지적으로 충만하게 살잖아 그걸로 충분해"라고 자신의 제자 파비앵에게 말하는 나탈리에게. 그리고 그것을 들어주는 파비앵이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파비앵이 꾸린 그와 그의 친구들의 농장에 방문한다. 농장엔 매일 같이 급진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젊음의 혈기가 왕성하다. 나탈리는 나서지 않고 젊음의 혈기를 따로 막지 않는다. 파비앵은 그런 그녀에게 보수적인 엘리트 지식인이 되었냐고 퉁명스럽게 말을 던진다. 파비앵이 던진 말은 나탈리에게 충격을 안긴다.

  제자가 자신을 한 때 가장 싫어했던 보수적 지식인이라 일컬어도, 자신의 저서가 더 이상 발행되지 않더라도, 딸이 이혼을 하고 슬피 울더라도 그녀는 삶을 지탱하는 자신을 놓아버리지 않는다. 크나큰 충격에도 스스로를 돌보고, 이제 새로운 저자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딸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해준다. 덤덤하진 않더라도 그녀는 그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한다.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 그녀는 자신이 맞을 새로운 시간을 받아들인다.

 지나간 것들과 지금의 것들, 그리고 맞이할 것들에 대해 그녀가 주는 시선을 보라. 나탈리는 지나간 것들에 목매여 고집부리지 않는다. 지금에서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내고 맞이할 것들에 대해 담담하게 맞이한다. 그녀는 자신이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바라보고 슬피 울고만 있지 않는다. 모두가 잃어가는 것들에 대해 슬퍼할 때 그녀는 얻게 된 자유와 새로운 역할을 준비한다. 떠나간 남편에겐 다시금 작별을 고하고, 자신에게 남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 이 모든 것은 노년을 바라보며 존엄하게 자신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그녀 자신으로부터 온다.

 그런 그녀가 갓 태어난 손자를 달래는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세상에서 아이가 가질 수없이 많은 혼자인  시간들에 대해 그녀는 자장가로 이야기할 것이다. 자신의 삶을 존엄하게 지켜온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노년과 또 새로운 시간을 살아갈 테니. 그녀가 이렇게 혼자가 되고 삶의 여럿을 상실하면서 얻는 것들을 보라.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보라. 그녀가 자신의 삶을 숭고하게 지켜내는 것들을 보라. 그녀의 삶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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