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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Nov 09. 2016

터지기 직전의 폭탄처럼

영화 리뷰 [라우더 댄 밤즈]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곳에 하나의 쇳덩어리가 있다. 차가운 쇠를 온몸에 두른 채로 말이다. 쇳덩어리는 순식간에 뜨겁게 타오른다. 뜨거운 열과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터져나간다. 폭탄이 터진다. 차가운 쇳덩어리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폭탄 앞에서 삶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진다. 전쟁의 참상도, 폭탄의 잔혹함도 모두 이 가벼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삶에 대한 불안으로 기인한다. 인간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가.

 [라우더 댄 밤즈]는 마치 폭탄 같은 영화다. 터지기 직전의 폭탄의 차가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니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구구절절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저 사연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슬픔을 버티는 시간을 보여준다. 무너져버린 그들의 인생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듯하다. '슬픔을 맞이하여 인간은 그저 울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감내할 뿐이다.'

 영화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자벨의 빈자리를 두고 방황하는 세 남자의 시선을 통해 진행된다. 이자벨이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사망 3주기 전시를 기획하며 다시 '집'으로 모이게 된 세 남자의 이야기다. 아버지 진과 두 아들, 진과 콘래드의 이야기를 오가며 진행된다. 영화는 딱히 주인공이라 할만한 인물을 내세우지 않는다. 이는 마치 '극적인' 혹은 '영화 같은' 분위기를 내지 않게 한다. 소설의 진행 방식과 유사한 이 영화는 한걸음 떨어져 영화를 보게끔 한다.  

 '폭탄보다 거대한'이라는 뜻을 지닌 [라우더 댄 밤즈]가 내건 제목처럼, 영화는 폭탄보다 거대한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나 함부로 이렇다 이야기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대한 슬픔은 삶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이는 몇 년이 지나도 삶에 여전히 남아있다. 어딘가 밍숭 한 영상이 보여주는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채도가 높지 않고 화려하지 않아도 감정은 살아있다. 우리의 삶을 애써 아름답게 꾸미지 않고 그저 내미는 것이 '차갑다'는 느낌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주의 : 아래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용이나 주요 대사에 대한 글이 있습니다


 영화는 계속되는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갑갑하게 조였다가도 시점을 바꾸며 인물에 대한 집중을 흐린다. 다른 시점으로 넘어가면 다시 클로즈업으로 화면을 조인다. 극한에 가까운 클로즈업은 눈과 입과 같은 국소한 범위에 카메라가 머물도록 한다. 인물이 보여주는 떨림을 극대화한다. 조용하게 인물의 반응을 살펴본다. 멀리 서는 알아차릴 수 조차 없었을 떨림은 클로즈업에서 격렬한 움직임으로 비친다. 거대한 떨림을 보여주고, 동시에 여러 인물을 오고 감으로써 그들 각각의 떨림을 얕은 관계의 선으로 이어준다.

 가족이라는 연결은 그들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한다. 사실 그들은 각자가 너무나도 달라 서로 말조차 쉽게 건네기도 힘든 사이다. 진과 조나, 조나와 콘래드, 콘래드와 진이 하는 대화는 쉽게 무너지거나 어렵게 전해진다. 그들은 이자벨을 잃은, 가족의 구성원이자 아내이자 어머니를 잃은 마음을 나누지 못한다. 해야 할 말들은 입술을 넘지 못한 채 묵묵히 잠긴다. 비슷한 슬픔을 공유하지만 그들의 소통은 무너진다.

 그런 그들의 소통을 극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다. 세 남자가 모여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사랑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슬픔을 침잠시키며 산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던 슬픔의 한기를 몰아내는 것은 사랑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또한 받아들이지 못해도 여전히 남은 관계의 고리. 남편은 아내를 사랑했고 두 아들은 어머니를 자신의 방법으로 따랐다. 이자벨이 길고 긴 출가에서 돌아와 집의 일원이 쉽게 되지 못할 때 그녀를 붙잡아 두었던 것은 가족들이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그녀가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은 영화가 보여주는 쓸쓸함과 묵묵함을 맞아 새로이 활기를 띤다.

 [라우더 댄 밤즈]는 폭탄보다 더욱 거대한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자신을 무너트리는 것, 보다 크게 자신을 짓누르는 것에 대해 보여준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삶에 깊게 베어 들어 그들 삶의 이면이 어떻게 허약한 빈 공간으로 '채워지는지'를 조명한다. 슬픔은 공허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감정이나 대상의 상실로부터 기인하지만 상실만이 슬픔의 상태는 아니다. [라우더 댄 밤즈]의 슬픔은 폭탄만큼이나 혹은 더 강렬하다.

 영화의 보여주기는 두리뭉실하다. 그것은 가족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감독이 개개인을 둘러싼 슬픔의 '분위기'를 보여주려고 해서인 게 아닐까. [라우더 댄 밤즈]는 그래서 슬피 울지 않는다. 애써 슬퍼하려 하지 않는다. 깊게 베어든 슬픔의 공간을 인식하고 지켜본다. 그리고 슬픔이 베인 곳을 다른 무언가로 덮으려 하지 않는다. 이는 어쩌면, 아픔을 모두 털어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듯하다. 우리는 폭탄처럼, 그렇게 짐짓 안에 움켜놓고 사는 걸 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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