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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우주나 Nov 22. 201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

영화 리뷰 [이터너티]

 *해석은 개인의 차이가 있습니다

 영화 [이터너티(Eternite)]는 여느 영화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삶에 대해 다룬다. [이터너티}는 19세기 부르주아 집안의 가정사를 다룬다. 그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또 아이가 성장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는 일련의 삶의 단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삶의 주요한 단계들에서 선택을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정말 재미없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이터너티]에는 이렇다 할만한 특이한 사건도 특이한 인물도 없다. 19세기 부르주아 가정의 평범한 가정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자라나고 결혼을 하고한 평범한 삶의 이야기들이 반복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영상미로 가득 채워진 이 영화는 영상미가 과분하다고 할 만큼 지루하다. 뻔하디 뻔한 이야기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신박한(참신한) 스토리'를 갈구하는 관객들에게 부르주아 가문의 아름다운 결혼과 삶이라는 이야기 주제는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터너티]는 영화가 주는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영화다. 그리고 또 곱씹어 보면 새로운 맛이 나는 영화다. 영화가 가진 것은 지루한 스토리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여정을 거친다. 작고 약했던 탄생에서 성장하는 시간을 지나 다시 작고 약해지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 여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단계'이다. 누구나 탄생을 통해 사람이 되고 죽음을 통해 존재를 거둔다. 탄생을 처음으로, 죽음을 끝으로 봤을 때 인생은 처음과 끝을 이어놓은 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세상엔 제각각인 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의 모습과 형태, 길이는 제각각이겠지만 그것은 여전히 '선'이다. 분명한 처음과 끝을 가지고 있다.

 이 짧고 가벼운 선들에서 점을 사는 인간들은 선을 여러 단계들로 나누고자 한다. 처음과 끝의 단계에 사이를 두고 다시 삶을 여러 단계로 나누는 것이다. 성년, 결혼, 자손의 탄생과 같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고 누구나 거칠 법한 일들을 삶의 한 단계로 생각한다. 이런 '단계'는 인간이 삶의 길이를 늘린듯한 느낌을 준다. 단순한 선으로 상정되던 '찰나'는 '단계들'을 통해 조금은 무거워진다. 사람들은 다채로운 단계를 통해 짧디 짧은 인생의 허망함은 조금은 무게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터너티]는 '영원'이라는 뜻을 가진 영화의 제목이 말하듯 영화는 영원히 반복되는 삶의 굴레에 대해 이야기한다. 발렌틴 삶을 이야기한다. 발렌틴의 탄생과 성장, 결혼으로 이어지는 삶의 단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후 가브리엘과 마틸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딘가 비슷하고 흔하디 흔한 삶을 산다. 관객들이 보기에 그들의 삶은 아름답지만 지루하고, 길고도 가볍다. 그들의 깊은 정서적 유대는 허무한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에 불과하다.

 가까이서 보면 각자의 삶에서 결혼을 하고 아들과 딸을 놓는 선택은 쉽게 선택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영화가 잡아놓은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입장으로 들어간다면 말이다. 반대로 조금만 멀리서 보자. 역사에서 개인의 존재는 가볍기 그지없어서 중대한 선택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순간에 지나가버린다. 발렌틴의 삶은 2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요약'된다. 아무리 길게 늘이려 해도 그녀의 삶은 짧은 기쁨의 시간을 지나 죽음으로 직결한다. 찰나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 되어버린다. 니체는 이런 인간의 짧은 삶을 위해 '신비로운 사상'을 이야기한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첫 문장에서 니체의 '영원 회귀'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원 회귀'를 따르자면 인간의 삶은 무겁게 변모한다. '영원 회귀'에 의하면 개인은 한 번의 삶으로, 그것에 영원히 종속된다. 즉, 짧디 짧은 개인의 삶은 개인이 무한히 종속되어야 하는 하나의 삶인 것이다. 모든 선택들은 영원히 '회귀'하기에(똑같이 살아야 하기에) 개인의 선택은, 삶은 더 이상 가볍지만은 않다. 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 회귀의 무거움을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렌틴의 삶에 한없이 다가가 보자. 극한으로 가까이 가면 그녀가 살고 있는 삶이 누군가가 영위하는 삶과 별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다만 어딘가 반복되는 인생의 부분들은 발렌틴의 삶이 마틸드의 삶으로도 이어져서, '영원'에 이르려고 한다. 삶은 계속될 것이다. 어떤 시련에 빠질지라도, 어떤 중대한 결정 앞에서도,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물론 삶의 어느 하나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발렌틴의 삶도, 가브리엘의 비극도, 마틸드의 마지막도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한 번뿐인 인생은 존재들에게는 가볍지만 한 존재에겐 감당하기 힘든 무거움일지도 모른다.

 [이터너티]의 유려한 색채로 가득 찬 화면들과 귀에 울리는 피아노 선율은 숨죽이고 '발렌틴'의 삶을 관조하도록 한다. 컷앤컷으로 이어지는 현재와 과거의 이야기는 삶이 어느 곳에서도 잘리지 않는 하나의 뭉텅이, 하나의 선임을 암시한다. '발렌틴'의 삶은 뭉텅이 채 관객에게 던져진다.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한 장면들, 서슬 퍼런 어둠에 눌리는 장면들, 그리고 이 둘이 교차하는 마틸드의 죽음과 마리의 탄생에 대해 그리면서. 그렇게 [이터너티]는 개인이 가진 삶이 한없이 가벼워 보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존재의 무거움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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