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라 랜드]
'꿈같은 상황'은 언제 벌어지는 걸까.
꿈결 같은, 꿈과도 같은 상황은 언제 내 눈앞에 벌어지는 걸까. 눈앞의 시대는 몰락하고 희망은 밝기를 유지하는 게 고작인 게 현실로 느껴진다. 모든 것들은 무너지고 또 무너진 곳에서 다시 무너진다. 나락에 끝은 없다. 무기력함이 등과 가슴으로부터 손끝 발끝까지 퍼진다. 오히려 이런 무기력에서 '꿈같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그러나 의식을 명료하게 잡고 있을 이유가 없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이유도 없다. '꿈'은 무너진 지 오래니까. 절망에 관하여 말하자면 누구나 밤을 새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불쌍함 배틀'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불쌍한 현실에 익숙하고 그 현실 속에의 존재들이니까.
절망은 희망의 빛이 내뿜는 범위를 제외한 나머지 인지도 모르겠다. '꿈'은 너무나도 멀고 괴리된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보통 꿈을 이루어야 행복을 찾을 것이라 믿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그러나 꿈은 나의 간절한 염원일 수도 있다. 포기해야 하고 남겨둬야 하는 아름'답던' 꿈으로 말이다. 그것에서 시간이 지나 멀어지고서야 알게 된다. '그땐 그랬지...'라는 무거운 침묵을 깔아 둔 말을 되뇌며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에 아름다운' 비극을 깔아 둔 희극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도 무거운 안갯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꾼다. 무너지거나 세우지도 못한 꿈을 마음에 품어 모진 풍파를 이겨내도록 돕는다. 비극의 현실에 파고든 희극을 쉽게 놓아줄 수 없다. 해피 엔딩에 대한 고집은 어느새 스스로의 이야기에선 당위가 되었다, 되어야 한다. 꿈이라는 것은 여전히, 아니 처음 꾸던 때보다 더욱 밝게 빛나는, 내 인생을 비추는 스포트 라이트니까. 멀어져도 밝게 빛나는 아름다운 빛이니까. 검은 세상을 비추는 빛과도 같으니까.
라라 랜드
12월, '꿈'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 [라라 랜드]를 만나고 왔다. 그야말로 꿈결 같은 영화였다. 음악이 일상에 더해져 벌어지는 마법 같은 순간을 만나는 듯한 영화였다. 스윙 재즈 풍의 신나는 음악, 듣는 순간 눈이 감기는 피아노의 반주가 인상적인 음악, 마치 대화를 대신하는 음악까지 뮤지컬 영화인 [라라 랜드]는 일상에 재즈를 더해 마치 꿈꾸는 듯한 인상을 준다. '꿈의 세계'를 뜻하는 [LALA LAND]는 제목에 걸맞은 꿈의 도시와 꿈꾸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조명하는 영화다.
감상적인 서사로 쓰인 서론이 무색할 만큼, [라라 랜드]를 보고 시간이 지나며 든 느낌은 이 영화가 가져다주는 행복감에 비례하는 아쉬움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만족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어딘가 씁쓸한 느낌이 길게 남았다. 왜일까. 2.35:1이라는 1950년대의 익숙지 않은 비율? 현실적이지 않은 '뮤지컬 영화'? 뻔하디 뻔한 멜로드라마의 이야기? 재즈라는 이국적 음악 양식? 글쎄, [라라 랜드]를 구성하는 이런 요소들은 익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볼 때는 행복감이 가득했다.
영화스러운 영화
'영화 같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 뜬금없는 질문이지만, [라라 랜드]를 보고서 나는 '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영화 같다'는 것은 부귀영화의 영화를 뜻하는 건 아니다. 휘황찬란한 무언가를 보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 같다'는 표현은 비현실적인 순간이다. 물론 부귀영화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말장난에는 단순한 의미가 들어있다. '영화 같다'는 표현은 비극으로 맺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쏘우] 같은 잔학한 일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살인 사건을 보고 '영화 같다'라는 표현을 쓰진 않는다. 이 진중하지 못한 '영화 같음'에는 비현실적이라는 조건이 깔려있는 것이다.
비현실적인 순간이 우리에게 와서 현실을 극복했을 때에 우리는 '영화 같다'라는 말을 쓴다. '원래'대로 라면 이루어지지 말았어야 하고 '원래'대로 라면 성공하지 못했어야 한다. 드라마에서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커플은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성공한다. [라라 랜드]는 아름다운 색감이 가득하고, 재즈의 낭만적인 선율과 힘찬 대화로 귀가 즐거우며, 멜로드라마라는 달콤한 이야기까지 모두 담긴 '행복 세트'다. 더욱이 [라라 랜드]의 시네마스코프(화면비율)에서부터 여러 뮤지컬 영화에서 착안한 낭만적인 씬들은 과거에 대한 거리낌 없는 향수를 보낸다. [라라 랜드]의 음악이 내 것이 아니고, 공간도 내 것이 아니지만 내 품속의 '꿈'과 낭만 깃든 추억은 [라라 랜드]의 '꿈'과 같이 울린다.
공진하는 '꿈'은 '영화 같은' 순간을 완성시킨다. [라라 랜드]의 행복 세트는 관객을, 적어도 필자를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했다. 127분이나 되는 러닝타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는 잊지 못할 장면들로 남을 거 같다. 이 영화적인 순간들은 영원히 내 낭만으로 남을 것이다. 제목처럼 꿈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
[라라 랜드]를 만들며 데미안 셔젤 감독은.
데미안 셔젤은 연인이 이별하는 순간을 조명하지 않는다. 여느 멜로처럼 헤어진 이유를 굳이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갈등의 양상을 보여주고서 연인은 급격히 이별해버린다. 그리고 '이랬으면 좋았을까'하는 풍의 엔딩 시퀀스를 보여주는데 환상과 현실이 결합된 이야기를 쭉 짚어낸다. 그들이 꿈꾸었던 것, 리아가 공연을 성공하고 세바스찬은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이 가득한 꿈들을 그려낸다. 이 아름다운 엔딩 시퀀스의 결말은 결국 헤어진 리아와 세바스찬의 얼굴을 비추고 그들이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것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은 그들이 이별했다는 결말만 보고 과정과 이유는 유추해버린 채 아름다운 엔딩 시퀀스를 받아들인다. 데미안 셔젤은 비극의 결말을 보여주지 않고 여느 관습에 기대어 희극으로, '꿈'으로 감싸 안는다.
리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은 이상적인 사랑이 되어버린다. 일과 삶에 축복을 가져다주며 서로에게 갈등이 없던 것처럼 행복했던 한 때로 남는다. 과거적인 음악, 스윙 재즈나 트리오 같은 30~40년대 재즈 스타일의 음악과 50년대 비율의 화면은 그 시대의 낭만을 더하며 이야기를 꿈처럼 만들어버린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고 나서 리아와 세바스찬이 싸우며 갈등이 심화되는 장면보다 신나거나 슬퍼서 아름다운 뮤지컬 장면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회귀와 '꿈'에 대한 이야기는 젊은 날들을 아름답게 기억하고자 하는 노스탤지어와 희망의 빛을 결합하여 눈부시게 빛난다. 그래서 [라라 랜드]는 마음을 움직인다.
비현실성이 현실에 닿을 때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명백히 판단했던 일이 일어났을 때 생겨난다. 비현실이 현실에 와서 닿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허상으로, 가짜로 존재하던 것들이 우리의 삶에 와서 닿을 때 말이다. [라라 랜드]는 비현실이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막힌다고 사람들은 노래하지 않는다. 이 '영화 같은' 영화는 비현실적이라는, 허상이라는 영화의 본질에 가까운 영화다. 비극적인 현실, 고통만이 가득한 현실에 [라라 랜드]가 와 닿을 때 기적이 일어난다. 이것은 영화가 가진 깊은 매력 중 하나이다.
영화는 희망을 던진다. 물론 희망 따윈 없다고 이야기하는 영화도 있지만 영화는 새로운 시각으로 희망을 되찾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가 던지는 희망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잡음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거나 분노하게 하고 즐겁게 한다. 이를 통해 영화와 관객은 대화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기적은 영화가 희망을 던지고 관객이 희망을 받아들이는 순간에 일어난다.
사람들은 비현실을 현실로 믿고 싶어 하고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한다. 희망은 불가능함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다. 어떤 영화로 인해 절망만이 가득했던 현실이 조금 나아진다. 희망을 가지고 비현실이 현실이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레미제라블]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는 사람들의 노래로부터 온다. 영화는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에너지를 얻는 하나의 대화가 된다. 에너지는 사람들에게 기적을 만드는 것에 힘을 보탠다. 이것이 우리가 아름다운 영화를 '꿈'처럼 마음속에 품고 사는 이유가 아닐까.
현실에서 [라라 랜드]를 보고 씁쓸한 이유는
'영화를 보고 단순히 나의 상황과 비교하려 해서'다.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던 나에게 [라라 랜드]는 비현실적인 행복에도 행복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이렇게 아름다운 세계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도 언제나 비극은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영화의 행복감을 여운을 지닌 채 곱씹는 게 아니라 단순히 상황적인 비교를 하면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더욱 초라해질 뿐이다. 감독은 [라라 랜드]를 환희와 행복으로 감싼 채 이야기하지만 이야기의 결말, 이별은 자연스레 드러나는 씁쓸한 맛을 전한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보다 헤어진 그들이 만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 [라라 랜드]를 위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지나온 뮤지컬 장면들이 보여주는 환상의 세계를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아름답게. "영원히 널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나서 헤어짐을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그 사랑과 신뢰가 무색한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포용하는 넓은 시간과 공간의 공감을 여전히 서로에게 중요한 유산으로 남겨두는 것이다. '셉스(Seb's)'가 남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