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소통은 별개인걸요.
라디오를 들었다. 한 아빠가 자녀와 친해지는 방법에 대해 조언을 구했다. 딸이 남자친구랑 놀러 간다고 용돈을 달라며 꺼낸 말에 화를 내고 용돈도 안 줬다고. 진행자들은 용돈으로 먼저 표현을 해라, 용돈을 달라하기 전에 먼저 줘서 다가가라는 조언들을 해줬다.
아니 이 진행자들아, 용돈이 필요한 딸과 대화를 원하는 딸은 다른데 왜 같은 방법의 해결책을 이야기하는 건데!
어릴 때 친구들은 우리 집이 화목하고 친구 같은 분위기인 것 같다고 했다. 화목한 건 맞는데 친구 같진 않아. 나는 대답했다.
분명 사이가 좋은 건 맞는데 나는 그런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차이를 알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과 '감정을 공유하는' 진정한 대화를 해본 적이 없다.
전화로 밥 먹었느냐, 별일 없냐, 물어보신다.
부모님의 사랑표현이다. 그것이 평생 해 온 그들의 최선의 언어적 표현이었으니. 하지만 그들의 걱정 안에 내 생각에 대한 질문은 없다. 사실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보다는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데.
나는 저녁밥을 방금 먹었고 요즘 며칠 동안 자격증을 위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질문에 대한 대답만 한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니다.
“오늘은 코로나 때문에 카페에서 공부를 하지 못한 지 일주일째예요. 집에서 혼자 8-9시간씩 책을 보고 냉동 볶음밥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설거지하고 30분 정도 예능 프로를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버려서 또 공부를 하고 자요. 요즘은 쉬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심해서 자기 전엔 좋아하는 발라드 대신 영어 스피치를 들으면서 잠을 청하고, 놀고 싶어질까 봐 친구들이랑 연락도 안 해요. 하루종일 아무랑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빠 목소리가 너무 반가워요. 목소리 들으니까 보고 싶어요.”
하지만 이런 말은 마음에 그냥 넣어둔다. 안 해본 게 아니기 때문에. 오늘 공부가 힘들었다고 하는 순간 취준생은 원래 힘들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잘 이겨내길 바라서 강해지길 바라서 하는 말인걸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르다. 그렇게 대화는 통하지 못한 채로 끝난다.
부모님을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힘든 일이 있거나 고민이 있을 때 부모님을 찾진 않게 되었다. 나는 50세가 넘은 엄마아빠한테 변화를 바라진 않는다.
그냥 부모님께서 내가 친구 같은 딸이 아닌 것에 서운해하시지 않기만 바란다.
그래도 변하고자 하는 부모가 있다면,
라디오에 사연을 보낸 아저씨께 굳이 말씀드리자면,
듣고 공감해 주시길 바란다.
일상의 이야기를 꺼낸 건 조언을 구하고자 한 게 아니라 응원과 지지를 원한 거다.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혼내시지 마시길 바란다. 아이의 감정을 차단하지 말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