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남자들(2)
홍진경이 유튜브에서 누군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게 감사한 일이지 않냐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근데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날 좋아하고, 기쁘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심지어 종종 그런 상황에 분노했어서 내가 못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에게 내가 당신을 이성적으로 느낀다는 어필을 한 적도, 오해할 만한 행동은 한 적도 없다. 나는 웃을 때 옆 사람의 팔을 때리는 습관도 없고, 동성친구들끼리도 팔짱 끼는 습관이 없다. 술은 마시지 않아서 취기에 안긴 적도 없고, 너에게 오늘 뭐 하냐는 선톡을 한 적도 없다.
그러다 그가 날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호감 차이에 따라 다른 사람과 대하는 게 달랐을 수는 있겠지만 나에겐 그냥 50명의 인간 중 하나였던 그였다.
옆에서 누가 말했다. 잘 어울려 둘이.
왜 저 언니는 우리가 잘 어울린다고 했을까?
내가 혹시나 오해할 행동을 했나?
둘이 있을 때 남들보다 더 친밀해 보였나?
착각은 자유지만
착각을 공표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망상도 자유지만
그걸 내뱉는 순간 그건 망상이 아니게 된다.
나는 그가, 혹은 그걸 본 누군가 오해하지 않도록 내 행동에 자기 검열을 하기 시작한다. 이러면 여지를 준거라고 생각할까? 이렇게 하면 무안하지 않을까?
그렇게 결정한 행동을 두고 또 누군가 왈가불가하는 걸 상상하고 그에 해명하는 나를 그린다.
선의와 친절, 혹은 그저 사람을 대하는 습관들에서 그들은 ‘여지’를 찾고 그의 호감에 대한 나의 ‘책임’을 묻는 상황을 상상하며 지쳐간다.
그렇게 그를 대하는 시간이 힘들어진다. 무례와 예의, 친절과 선긋기 사이에서 정답을 찾으려 애쓴다.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나는 그를 만나는 시간이 싫어진다. 그가 싫어진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의 씹을 건덕지가 된 나를 스스로 의심하고 검열하는 나 자신이 미운 거였다.
내가 미운지 몰라서 그를 미워한 것 같다.
친절하지 않으면 어때,
누군가는 여지준거라고 하면 어때,
거절하고 무안 주면 뭐 어때,
나는 이런 사람인데.
스스로 믿어주기.
그걸 못해 흔들린 게 그의 탓인 줄 알았던 거다.
그래서 이제는 그에게 고맙냐고 물어본다면,
잘 모르겠다.
언젠간 고마워할 날이 온다면 그때는 더 많이 성숙해져 있는 날이지 않을까 싶지만, 아직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