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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정신과 다니려고

식이장애 기록(2)

by 애랑


식이장애를 인지한 지 1년이 넘어서야 정신과의원에 첫 발을 디뎠다.

식이장애 전문 정신과는 전국에 10여 개 밖에 안 돼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양재였고, 1회 상담에 10-15만 원 비용이 드는데 상태에 따라 주 1회 정도 다닌다고 했다. 인터넷에 이런저런 방법이 많이 나와 있으니 마지막으로 혼자 해보자며 버티고 버티다 보니 시간이 계속 지나갔다.

솔직히 남들 다 하는 '밥 먹기'를 못해서 병원에 간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조금 더 노력하거나, 충동을 잘 이겨내거나, 의지를 다잡으면, 혼자 이겨낼 것 같았다. 그렇게 실패는 반복되었고 바닥은 계속 깊어고 있었다.


고민하다가 엄마한테 전화를 했다. 식이장애 정신과치료를 받아야겠다고 말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광양에 내려와서 고치라고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지. 엄마아빠가 날 옆에 끼고 있는다고 뭘 해줄 수 있는데. 회사를 그만두는 게 더 큰 각오가 필요하고 미래를 다 걸어야 되는 건데 왜 쉬운 길을 두고 어려운 선택을 하라는 건지. 생각을 하면서 대답하는 건가. 대화가 계속 헛돌았다. 정신과에 편견이 있는 엄마를 이해시키려다가 답답함에 울었다. 엄마가 병원에 같이 가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사실 엄마를 만나기 싫었다. 만나면 꼭 살이 쪘니, 피부가 안 좋아졌니, 외모 이야기를 너무 쉽게 하는 엄마였다. 가벼운 언행들로 날 상처 줄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런 대화를 더는 반복할 자신이 없어서 엄마를 이해시키는 것을 의사한테 넘기기로 했다.



며칠 뒤 엄마가 자취방으로 왔다.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이어진 대화로 나의 상태를 엄마한테 이야기하게 됐다.


나도 모르겠어. 왜 내가 음식을 입에 넣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왜 친구랑 웃으면서 놀아놓고 집 와서 토하고 울고 있는지 모르겠어. 엄마, 음식 먹고 위가 너무 아픈 적이 있어? 나는 있어. 토를 자주 하니까 턱이 붓고 얼굴 모양이 이상해졌어. 못생겼어. 실패자 같아. 친구들은 내가 엄청 독하고 완벽하고 멋진 여잔줄 알아. 이런 모습을 어떻게 보여줘. 혼자는 못 있겠는데 누구랑 같이 있는 건 더 못하겠어. 밥을 어떻게 먹는 건지 언제까지 먹는 건지 모르겠어. 내 하루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못 견디겠어. 토를 자주 하면 나중에 토가 안 나와서 계속 계속 깊게 손가락을 넣게 된대. 그러다가 손가락이 물건이 되고 목구멍이 찢어지기도 한대.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서워. 병원에 가면 도와준대. 눈앞에 내가 먹고 남은 과자랑 빵 봉투들이 가득 쌓여있는데 먹은 기억이 없어. 내 모습이 너무 싫어. 평범하게 살고 싶어.


일부는 이야기했고

일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상처 주는 질문들을 받았지만 공감해 주려고, 응원해주려고 하는 게 보였다. 이해를 받을 수 있구나 하는 약간의 희망을 봤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점심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르다며 저녁을 안 먹는다고 했다. 어디선가 식이장애 환자들이 끼니를 거르는 게 더 안 좋다고 봐서 그걸 지키고 있었다. 냉동해 둔 240g도 안 되는 흑미밥이랑 김, 김치를 꺼냈다. 내 밥을 보더니 엄마가 말했다.

너 그걸 다 먹으려고? 반만 먹지.


가족을 향한 그 정도의 분노는 처음 느껴봤다. 차린 상을 손으로 쓸어 던지는 충동을 겨우 참아냈다. 엄마를 이해시키기 위해 남은 감정을 긁어 보여줬던 시간과 노력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 한 마디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그렇게 더 이상 엄마의 이해를 바라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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