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의 심장에 탑을 세운 건축가
오늘의 친구는 왕의 명령으로 타국에 다녀온 인물입니다. 그는 타의에 의한 파견이었지만 타국에서 성심성의껏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오늘의 친구는 예술가로서의 자부심과 조국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줄타기해야 했던 고독한 사람. 백제의 건축 장인 아비지(阿非知)입니다.
망치 소리가 멈추자, 서라벌의 하늘이 무너질 듯 울었습니다.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의 수도 서라벌. 그 한복판에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거대한 목탑이 세워졌습니다. 무려 아파트 30층 높이(약 80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목조 건축물, 황룡사 9층 목탑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라의 자존심을 세운 총감독이 다름 아닌 적국 '백제'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시나요? 황룡사 9층 목탑은 바로 오늘의 친구 아비지의 작품입니다.
643년, 신라의 선덕여왕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거대한 탑을 짓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의 기술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신라는 자존심을 굽히고 건축 기술이 뛰어났던 적국 백제에 사신을 보내 "보물과 비단을 드릴 테니 장인을 보내달라"라고 간청합니다.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대당 외교와 신라 압박이라는 복잡한 정치적 계산 속에서 이를 허락합니다. 그렇게 선발된 인물이 바로 백제 최고의 건축가 아비지였습니다. 그는 200명의 기술자를 이끌고 적국인 신라로 향했습니다. 아비지에게 있어서 신라 파견은 기술자로서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회였지만, 적국으로 간다는 점에서 마음 한구석은 돌덩이처럼 무거웠을 것입니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탑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는 꿈을 꿉니다. 바로 조국 백제가 멸망하는 꿈이었습니다. 꿈에서 깬 그는 전율했습니다. 자신이 짓고 있는 이 탑이 사실은 '신라를 위협하는 9개의 적국을 제압한다'는 염원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9개의 적국 중에는 당연히 자신의 조국, 백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내 손으로 내 조국을 짓밟는 탑을 세우다니..." 아비지는 공사를 멈추고 주저앉았습니다. 예술가의 혼으로 탑을 완성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는 애국심이 그를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묘한 노인(혹은 장사)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는 결국 다시 연장을 잡았습니다. "비록 적국의 땅에 세우지만, 이 탑은 백제의 기술, 백제의 혼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는 조국의 멸망을 예감하면서도 예술로 승화된 자신의 분신을 완성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645년, 마침내 황룡사 9층 목탑이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사람들은 그 웅장함에 압도되어 환호했지만 그 환호성 뒤편에서 아비지는 남몰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세운 탑은 이후 600년 가까이 서라벌의 랜드마크로 군림했지만 정작 아비지는 탑이 완성된 후 역사 속으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9층 목탑은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사라졌지만, 적국의 하늘에 자신의 예술혼을 새겨 넣었던 아비지의 이름만은 영원히 남아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과 정치 속에서 고뇌했던 사람. 무너져가는 자신의 마음을 층층이 쌓아 올렸던 아비지와 친해지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