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하게 베여버린 첫사랑
짙은 어둠이 깔린 서라벌의 밤, 술에 취한 소년을 태운 말이 익숙한 길을 따라 멈춰 선 곳. 그곳에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눈물 흘리며 웃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맞이한 것은 서늘한 칼빛과 붉은 피, 그리고 차갑게 돌아서는 남자의 뒷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의 친구는 영웅 김유신의 신화 뒤에 비극적인 희생양으로 남겨진 여인, 천관녀(天官女)입니다.
멸망한 가야 왕족의 후손이었던 김유신. 뼛속까지 신분제였던 신라(골품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의 가문은 늘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방황하던 소년 유신에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녀(혹은 기녀)였던 천관녀의 품은 유일한 도피처이자 안식처였습니다. 두 사람은 깊이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은 아들의 방황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가문을 일으켜 세워야 할 네가 기생의 품에서 놀아나다니!"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질책 앞에 유신은 그녀의 집문턱을 다시는 넘지 않겠다고 눈물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유신은 한동안 어머니의 말을 따르기 위해 천관녀를 찾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훈련과 낭도들과의 술자리에 지쳐 만취한 유신을 태운 말은 자주 걸었던 길을 따라 천관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오랜만의 인기척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달려 나온 천관녀였습니다. 하지만 잠에서 깬 유신은 술에 취한 자신의 나약함과 맹세를 어겼다는 것에 분노하며, 단숨에 허리춤의 칼을 뽑아 자신이 아끼던 말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이 사건을 김유신이라는 사람이 첫사랑을 매정하게 떠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은 김유신이 가문의 생존이라는 정치적 현실을 자각하고 청춘의 방황을 끊어낸 잔인한 통과의례였습니다. 영웅으로 각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약한 고리였던 사랑을 스스로 처형한 것입니다.
남겨진 천관녀는 어땠을까요? 그녀는 자신을 버린 남자를 원망하는 대신 해서 자신의 절망을 담은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어 부르며 평생 비구니로 살았습니다. 훗날 삼국을 통일하고 백발의 노인이 된 김유신은 그녀가 살던 집터에 천관사(天官寺)라는 절을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은 권력의 정점에 선 영웅이 뒤늦게 바치는 핏빛 참회록이었을까요?우리는 흔히 대의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버린 김유신의 결단을 찬양합니다. 하지만 그 찬란한 승리의 역사 이면에는 천관녀의 짙은 고독이 스며 있습니다. 천관녀의 슬픈 사랑을 기억하며 그녀와 좀 더 친해져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