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속 사랑과 정치의 현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본 이야기. 마를 캐던 백제의 가난한 소년 서동이 신라의 아름다운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아이들에게 동요(서동요)를 부르게 했다는 로맨틱한 전설. 하지만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진짜 역사가 시작됩니다. 적국이었던 백제의 왕과 신라의 공주, 두 사람의 결합은 과연 동화처럼 아름답기만 했을까요?
오늘의 친구는 이 전설의 주인공이자, 훗날 백제의 왕이 된 무왕(서동)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입니다. 백제 익산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를 모시던 가난한 소년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적국의 수도인 서라벌로 향합니다.
그는 동네 아이들에게 맛있는 마를 나누어주며 은밀한 노래 하나를 부르게 하죠.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 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발칙한 가짜 뉴스는 아이들의 입을 타고 금세 서라벌 전체로 퍼졌고 분노한 진평왕은 공주를 궁에서 매몰차게 쫓아냅니다. 눈물을 지으며 유배 길에 오른 공주 앞에 서동이 짜잔 하고 나타나고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백제로 돌아가 왕과 왕비가 된다는 완벽한 해피엔딩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결혼은 단순한 사랑의 도피가 아니라 매우 치밀하게 계산된 신라와 백제 왕실의 정치적 혼인 동맹이었습니다. 당시 신라의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습니다. 첫째 딸 덕만(훗날 선덕여왕)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왕실 내부의 반발을 잠재우고 외부의 안정을 꾀해야 했죠.
그래서 둘째 딸은 왕족인 김용춘에게 셋째 딸인 선화공주는 백제의 실력자였던 서동(무왕)에게 시집을 보낸 것입니다. 선화공주는 조국의 평화와 언니의 왕위 계승을 위한 볼모이자 외교관이었던 셈입니다.
백제 무왕의 입장에서도 신라 공주와의 결혼은 자신의 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은 백제 귀족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백제의 최고 권력 가문이었던 사택(沙宅) 가문의 견제는 매서웠습니다.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던 중 세상을 발칵 뒤집은 유물 하나가 발견됩니다. 바로 사리봉안기입니다. 여기에는 미륵사를 세운 왕비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 출신인 사택왕후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유물의 등장으로 "선화공주는 가짜였다!"라는 논란이 일었지만, 여러 역사학자들은 두 여인이 모두 무왕의 부인이었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금당이 있는 거대한 사찰인데 중앙의 목탑은 신라 세력을 등에 업은 선화공주가 세웠고, 나중에 서쪽과 동쪽의 석탑은 백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사택왕후가 세우며 치열한 내명부의 권력 투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선화공주의 삶은 어땠을까요? 낯선 적국에서 남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미륵사라는 거대한 절을 세웠지만 백제 귀족들의 텃세에 시달리며 남편이 또 다른 부인(사택왕후)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무왕 역시 사랑하는 아내와 조국의 이익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줄타기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무왕은 재위 기간 내내 신라를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선화공주의 가슴은 얼마나 까맣게 타들어 갔을지 짐작할 수도 없습니다.
서동요의 낭만적인 선율 뒤에는 이처럼 두 제국의 생존을 건 치열한 정치와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한 여인의 고독이 숨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역사의 서늘한 민낯을 마주하며 동화보다 더 극적이었던 무왕과 선화공주와 친해져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