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서평] 모비딕/허먼 멜빌

광기, 숭고함과 괴물의 한 끗 차이

by cm

오늘 이야기할 책은 출간 당시만 해도 문학 작품이 아닌 백과사전이라는 오명을 듣고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하지만 작가 사후에 재평가되어 미국 문학의 자존심이자 인류가 남긴 가장 위대한 서사시 중 하나로 꼽히게 된 걸작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허먼 멜빌의 <모비딕>입니다.


"나를 이스마엘이라 불러다오."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입부 중 하나로 시작하는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한 흰 고래를 잡으려는 포경선 피쿼드호의 모험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거친 파도 아래로 깊숙이 잠영해 들어가면 인간의 광기와 집착, 그리고 자연에 대항하는 고독한 영혼의 처절한 투쟁이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모비딕.png

피쿼드호의 선장 에이허브는 과거 자신의 다리 한쪽을 앗아간 흰 고래 '모비딕'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금지된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에게 모비딕은 복수하고 잡아야 할 짐승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운명의 상징이자 인간을 비웃는 자연의 무심한 얼굴이며 반드시 정복해야 할 악의 화신이었습니다. 소설의 줄거리는 어떻게 보면 단순합니다. 모비딕을 잡기 위한 에이허브의 광기 어린 모험과 그 광기에 올라타버린 선원들의 얘기가 전부입니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이 지독한 광기를 묘사하는 멜빌의 압도적인 문장에 있습니다. 에이허브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선원들의 안전과 경제적 이득이라는 현실적인 가치들을 모두 불살라버립니다. 그의 모습은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차라리 파멸할지언정 저항하는 인간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의지가 타인을 희생시키고 스스로를 고립시킬 때, 그것은 숭고함을 넘어선 비극적 괴물이 됩니다.


소설의 결말에서 피쿼드호는 결국 모비딕과의 사투 끝에 깊은 바닷속으로 침몰합니다. 에이허브 선장은 자신이 쏜 작살 줄에 목이 감겨 고래와 함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가죠. 이 장대한 몰락의 현장에서 오직 관찰자인 이스마엘만이 살아남아 이 비극의 기록자가 됩니다.


<모비딕>이 다른 모험 소설과 궤를 달리하는 이유는 문장 말고 또 있습니다. 바로 소설 곳곳에 삽입된 방대한 고래 관련 지식과 철학적 사유입니다. 멜빌은 고래의 해부학적 구조부터 포경의 역사, 기름을 짜는 과정까지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이러한 지식의 나열은 고래에 대한 정보 전달하려는 목적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정복하기 위해 동원하는 모든 학문적 노력이 정작 실체도 알 수 없는 거대한 바다와 고래의 신비 앞에서는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장치입니다.


모비딕은 에이허브가 부여한 악마의 이미지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고래는 그저 고래일 뿐이며, 바다는 배가 침몰한 뒤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물결칩니다. 인간의 치열한 복수극과 실존적 고뇌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침묵할 뿐이라는 이 냉혹한 진실은 우리들에게 서늘한 전율을 선사합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다에서 자신만의 모비딕을 쫓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성공에 대한 갈망일 수도, 누군가를 향한 해소되지 않은 증오일 수도 있습니다. 멜빌은 에이허브의 몰락을 통해 묻습니다. 당신이 쫓는 그 목표는 당신을 구원할 빛인가 아니면 당신을 집어삼킬 심연인가.


"하지만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에 구멍을 뚫을 수 없으리라."



금요일 연재
이전 08화[5분 서평] 세일즈맨의 죽음/아서 밀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