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병실의 엘리스들』

2화: 보이지 않는 커피잔

by 시간 여행자

미선은 커피가 없으면 하루를 못 산다고 했다.

"나 커피 없으면 진짜 안 돼. 머리가 안 돌아가."


그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병실에 있던 누구도 미선이 스스로 커피를 사 오는 걸 본

적이 없다.


"언니, 나 하나만 타줘 봐. 오늘 진짜 기운이 없어."


그녀는 50대 초반으로 보였고, 만성질환으로 입원한 상태였다.

수술 흔적이 있었고,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웠다.


"내가 관리를 못했지 뭐. 여러 가지 안 좋은 습관도 많았고. 근데 사람 사는 게 뭐, 다 계

획대로 되나?"


그녀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먼저 말했지만, 그건 솔직함이라기보다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선 긋기처럼 보였다.


미선은 혼자 산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의 정확한 상황을 알지 못했다.


미선은 자신을 바쁘고 사랑받는 사람으로 포장하는 데 익숙했다.


"지인이 음료수 사다 줬어. 같이 마셔. 나 이런 거 나눠 먹는 거 좋아해~"


"내가 옛날엔 자영업도 했었지. 요즘은 좀 쉬는 중이야."


그 쉬는 중이 얼마나 긴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사실 음료수는 병원 1층 편의점에서 간신히 사 온 것이고,

'지인'은 누구도 본 적이 없었다.


병실에서 미선은 늘 한 발 앞서 있는 사람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가장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작은 손거울,

불 꺼진 병실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

전화는 꼭 복도에서 조용히 받는 습관.

그 모든 게 '나는 괜찮다'는 연기를 위한 작은 무대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자기 고독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걸 커피와 작은 허세로 덮는 데 능숙했다.


하지만 병실엔 또 다른 존재감이 있었다.

명자 씨. 60대 중반, 체구가 크고,

목소리 크고, 생색 잘 내고, 남에게 시키는 데 능한 여자.


미선보다 열 살은 더 많았지만, 미선보다 한 수 위처럼 행동했다.


미선과 명자는 처음엔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러나 둘 다 **'중심에 있어야만 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병실은 너무 좁았다.


미선이 말했다.

"지인이 사다 준 원두커피인데, 한번 드셔봐요. 입맛에 안 맞을 수도 있어요~ 좀 비싼 거라~"


그러자 명자가 답했다.

"난 위가 약해서. 난 오히려 싼 게 속이 편하더라."


미선은 TV 리모컨을 쥐며 말했다.

"밤엔 내가 드라마 봐야지. 어차피 낮엔 다들 안 보잖아요?"


명자가 씩 웃으며 받아쳤다.

"낮에도 나는 뉴스 보고 싶은데…

맨날 드라마만 보면 현실감각이 떨어진다니까~"


미선은 바로 쏘아붙였다.

"그래서 그런가, 가끔 현실보다 드라마가 덜 자극적일 때도 있어요~"


둘은 커튼 너머에서만 싸운다. 큰 소리는 없다.

대신 말끝마다 가시가 섞여 있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되, 결코 먼저 고개를 숙이지 않는 방식.


그날 밤, 미선은 커튼을 닫은 채 립스틱을 꺼내 바르며 혼잣말을 했다.

"여자들 무섭다니까… 괜히 착하게 굴면 만만하게 보더라."


그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일까.

명자였을까, 나였을까, 아니면 자기 자신?


미선은 퇴원 하루 전, 조용히 말없이 커피 한 캔을 내게 건넸다.

"언니는… 진짜 괜찮은 사람이더라."


그 말엔 커피보다 진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녀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작은 손거울 하나와 빈 캔 두 개.

그리고 허세처럼 보였던 말들 속에 숨겨졌던 외로움 한 조각.


✏️작가의 메모

"허세로 보였던 말들은 사실 방어였다.

자존감은 없는데 자존심은 많은 사람,

미선은 그렇게 자신을 보호하며 버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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