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만들어준 용서와 화합의 시간_책에게 보내는

나의 진심어린 사과문

by 지금은 디자이너


나는 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야!


인생 편하고 잘 나갈 땐 나 몰라라 하다가 마음이 괴로워질 때만 나를 찾는 사람,


그러다 또 잘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횅하고 떠나버리는 그런 사람.


우리는 종종 이런 이들이 뱉어낸 감정의 찌꺼기를 치워내며 살아간다.


사실 나도 언젠가는 그 누군가에게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확신할 수 없기에,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이런 존재가 되지 않지 위해 노력할 뿐이다.




거짓말하지 마.


그래, 사실은 난 또 이런 짓을 무엇인가에게 해버렸다. 다행히 이번엔 그 대상이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책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책은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마음이 괴로울 때,


흔들리는 내 마음을 어찌할 바 모를 때,


또다시 인생이란 여정에 길을 잃은 듯 막막할 때,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무기력 해질 때,


마음 둘 곳 없어 쓸쓸해질 때,


이렇게 나는 힘이 들 때만 찾아가는,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강렬했던 너와의 추억


나는 학창 시절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고, 좋아하는 장르의 책만 골라서 보는 편식적인 독서인이었다. 중학교 때는 김진명 작가의 책에 빠져서 그것만 읽고, 그다음엔 무라카미 하루미의 소설만 엄청 파댔다. 그렇게 적당히 특정 작가들의 책을 읽고 살다가 어느 날 책이 나에게 절대적 존재가 되었던 시기가 온다.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


3개월 예정으로 갔던 미국 어학연수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휴학하면 졸업할 수 없다는 학교의 통보와 그래도 대학은 졸업하라는 부모님의 권유 같은 압박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있는 내내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내 꿈을 반드시 찾으리라!" 이렇게 다짐을 수백 번도 했었다.


현실은 자소서 인생.


대학교 마지막 학기는 그저 무한의 자소서 쓰기의 연속이었다.(십 년 전일이라 지금은 조금 바뀌었기를 바라본다) 경제학과를 다니던 나는 금융권, 은행권을 준비하는 선배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이상한 애'로 통했다. 그들은 나를 '철없는 이상주의자'쯤으로 봤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철저하고도 외롭게 내 마음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 중이었다. 미국에서 느꼈던 내 꿈에 대한 갈망과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치열하게 달려가야 한다는 압박감의 중간, 그 어디쯤 나는 붕-하고 몸이 떠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현실 속에 살지만 마치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영혼 없이 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에 몇 군데 기업에 지원해놓고 그 죽일 놈의 자소서를 쓰는 시간이 되면 하루 종일 의식 없이 떠돌아다녔던 영혼은 더욱더 불안해졌다.


쟤는 왜 저렇게 책만 읽어?


자소서라는 놈이 내 영혼을 갉아먹던 그 시기에 내 주변엔 이런 나의 고민을 공감해줄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다들 괴로워도 참아내고 하는 일을 나만 그저 유난 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강의실에서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가슴이 답답해질 때, 내가 찾은 곳이 학교 도서관이었다. 그렇게 숨 쉬러 하루 이틀 가다 보니 내 손엔 언제나 대여한 책 2-3권이 들려있었다. 때로는 반납할 책까지 5-6권을 죄다 들고 학교에 가서는 강의실 맨 끝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지나가던 선배들이 날 바라보던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조금은 한심한 듯, 조금은 불쌍한 듯 동정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또다시 너를 찾았다.


그렇게 책 속에서 용기와 위안을 받고 나는 지난 10년 앞만 보고 달리며 뉴욕에서 일하는 디자이너라는 꿈을 이뤘다. 그저 살아내는 게 바빠서,라고 말하면 핑계겠지만, 그렇게 나는 또 새로운 인생을 살며 책을 멀리했다. 종종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던 예전의 나로 돌아가서 말이다.


그렇게 살다 요 몇 년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졌다. 꿈은 이뤘는데 왜 또 인생에 고민이 생기지? 내가 열정적으로 하는 일만 생기면 끝나는 것 아니었어? 20대의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이 끝난 지금, 30대가 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고 있다.


사실 나는 답은 알고 있었다. 나는 결국 또 그렇게 책에게 질척대면서 나를 살려달라고 매달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힘들 때만 찾아오고 훌쩍 떠나버리는 그런 만남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할 인생의 친구로서 책과 다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힘들 때 의지만 하던 사이가 아니라 기쁠 때도, 마음이 여유로울 때도 함께 하면서 풍요로운 인생을 같이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코로나가 만들어준 용서와 화합의 시간'


재택근무와 함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시간이 주어졌다. 인생에 다시없을 소중한 이 시간에 나는 매일 책과 함께하며 또한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


"그동안 힘들 때만 찾아와서 미안해. 이제는 항상 니 옆에 있을게."


그렇게 나는 올해 100권의 책 읽기 프로젝트와 그 생각의 변화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모든 게 멈춰버린 뉴욕에서 우울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의 이야기를 연재해볼까 합니다. 모든 것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듯 자가격리도 달리 보니 제 인생에 다시없을 성장의 기회로 보이더군요. 담백하고 솔직한 뉴요커의 슬기로운 격리생활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의 성장도 한 번쯤 생각해볼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재택근무 13주 차, 과연 끝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