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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Jun 09. 2020

미국에도 있다. 죽일 놈의 갑과 을의 관계

나는 을에서 갑이 되었다




"아, 영어도 너무 스트레스고 부모님이랑 떨어져 사는 것도 지치고, 나 이제 한국 가서 일할까 봐."


나의 이 말에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경험한 대학원 후배가 입에 침을 튀기며 왜 한국에 돌아가면 안 되는지, 친절하게 팩폭 같은 이유를 쏟아낸다. 한참을  듣던 나는 의아해졌다. 이 후배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그런 회사, 그것도 갑의 위치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도 왜 이렇게 '갑과 을'에 대해 열을 올리는 걸까?


그렇다. 나는 단순히 갑 과 을의 관계를 대기업 - 중소기업 또는 거래처 - 납품업체 등의 개념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 중요한 지위에 있는 자(甲), (상대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는 자(乙)이라 부른다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니, 갑과 을은 권력에 의한 상하관계가 생기는 모든 관계를 칭하는 말임을 깨닫는다.


사장과 직원, 회사와 프리랜서, 상사와 부하직원, 고객과 직원. 이렇게 우리가 사회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관계에는 상하관계가 존재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갑질에 고통받을 위험에 노출되어있다.


그렇다면 미국 회사에는 어떤 갑과 을의 관계가 존재할까?





갑과 을의 관계 #1


대기업(Client-side or In-house team) - 중소기업 또는 협력업체(Agency)


내가 몸담고 있는 마케팅이나 홍보 쪽 일을 찾다 보면 In-house와 Agency라는 개념을 접하게 된다. In-house는 특정 브랜드에 속해서 그 브랜드에 관련된 일만 하는 것이고 Agency는 한국의 광고회사처럼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함께 일하며 그들의 프로젝트의 일부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나는 작년 9월, 대기업에 속해있는 In-house 디자인 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계속 에이젼시 생활을 했다. 작은 규모의 에이젼시부터 그 규모가 여느 대기업만큼 큰 에이젼시에도 일해보며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처음 일 시작할 무렵엔 '그래도 미국엔 합리적인 사람들만 있겠지.'라는 야무진 착각을 했었다. 물론 이 믿음은 얼마 가지 않아서 깨져버렸다.


"이게 그 죽일 놈의 갑과 을의 관계구나!"'


이걸 뼈저리게 느낀 건 닌텐도의 미주 마케팅을 담당하는 팀에서 일할 때였다. 회사에서 닌텐도에서 가져오는 프로젝트는 상당한 부분을 차지했고 그만큼 모든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조직이라는 피라미드의 가장 밑에 위치하던 '일개 디자이너'였던 나는 클라이언트의 말 한마디에 수없이 야근을 해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본인들도 자기들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는 사실. 당연히 스스로 모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세상 똑똑한 척 말하지만, 그들의 '피드백'은 그저 의미 없는 단어들의 향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 뿌린 게 아니라 튄 것''이라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갑과 을의 관계 #2


회사 - 프리랜서/계약직(Freelance/Contract)


종종 '계약직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관련된 한국 기사를 본다. 미국에도 정규직(Full-time employee)과 계약직(Contractor)이 있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이건 한국에서 말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개념은 아니다. 미국은 노동시장이 매우 유연해서 언제든 회사가 어려워지면 사람을 해고할 수 있다. 이는 고용의 안정성이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또 다른 직장을 찾기가 쉽다는 반대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오히려 요즘은 먼저 계약직으로 3개월 일해보고 그 직장이 나에게 맞으면 풀타임으로 재계약을 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다. 나도 혹시라도 직장이 나와 안 맞을 리스크 때문에 프로젝트 기간 동안만 일하는 계약직을 선택해서 일한 적이 몇 번 있다. 물론 계약직과 정규직 각각 장점이 존재한다.


정규직은 소위 Benefit package라고 불리는 각종 혜택(보험, 미국의 퇴직연금인 401k, 유급휴가 등)을 보장받는다. 계약직은 이런 혜택이 없는 이유로 시간당 급여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물론 경력직 계약직에 한해서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갑과 을의 관계 #3


상사와 부하직원


사실 사람들이 회사생활을 하면서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여기서 오지 않나 싶다. 구조 자체에서 오는 부당함은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매일 얼굴을 맞대고 일해야 하는 상사가 부리는 갑질에는 답이 없다.


슬프게도 한국어로 '갑질'을 구글에 검색하니, 수없이 많아서 다채롭기까지 한 갑질 사례가 쏟아진다.


미국 직장에서도 상사의 무차별적인 갑질이 있을까?


이건 온전히 상사의 개별적 인격에 달려있다. 물론 미국 직장도 성격이상자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어느 정도의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게 직장생활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내가 만난 직장의 상사들은 '비합리적인 수준의 갑질'은 하지 않았다. 개인마다 스타일이 다를 뿐이지 인격적으로 나를 밟아 내리거나 인격모독을 하는 수준의 갑질은 겪어 보지도 않았고 또한 이를 방지하기 위한 회사 내의 대책도 다양하게 존재한다.




미국 취업, 무조건 대기업이 최고다?


미국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사회초년생(특히 마케팅 분야)중 이름이 있는 브랜드에 들어가야 한 성공한 취업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 이 그렇듯 여기에도 장단이 존재한다. 대기업은 연봉과 각종 혜택이 좋지만 일의 단조로움과 딱딱한 조직문화를 견뎌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또한 사회 초년생(특히 포트폴리오가 중요한 디자이너)에겐 이런 느린 페이스와 반복되는 업무는 치명적일 수 있다. 충분한 내공이 쌓이기도 전에 안일하고 편안함만 추구하다 3-4년이 되면 기존 조직에서도 도태당하기 십상이다.


반면 에이젼시는 처음 입사하면 '내가 이러려고 그 비싼 돈을 주고 여기서 유학했나'라는 회의가 들 정도로 소박한 월급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20대라면 한 번쯤은 경험해보고 싶은 자유로운 조직문화와 창의적인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다. 나는 처음 에이젼시에서 일한 몇 년 동안 새로운 개념의 자유로운 회사생활에 끊임없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며 엄청난 포트폴리오를 쌓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는 손목 결절 증후군으로 톡톡히 치렀지만 후회는 없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나는 이제 갑이 되었다.


'을'에서 '갑'이 되니 살 것 같지 않아?

친구가 묻는다.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 지금은 을로 살지만 언젠가 갑이 되어서 나도 당한걸 다 갚아주겠다는 그런 마음이 보인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갑’이 되어 갑질을 하고, ‘을’이 되어 상처 받기도 한다.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슈퍼갑질'까지는 어찌 못한다 해도, 그냥 나부터라도 갑질의 고리를 끊어보려 노력하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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