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백수가 된 여름
그게 최선이었어
회사에서 해고 소식을 듣고 며칠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냥 쉬기로 했다. 날이 뜨거운 여름에 백수가 되니 오히려 좋은 점이 있었다. 모든 걸 다 태워버리겠다는 듯 뜨겁게 내리쬐는 이 태양을 맞고 있자니, 조금이라도 축축하게 젖은 마음까지 다 바싹 마르는듯했다. 마음까지 얼어붙는 매섭게 추운 겨울이었다면 어땠을까? 고요한 세상 속에서 혼자만 한 발자국 떨어져 나간 사람처럼 조금 울적해졌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유롭게 일어나 집 앞 산책길에 나가보니 숲 전체가 짙은 초록빛으로 가득했다. 울창한 나무숲으로 들어가니 뜨거운 태양은 모습을 감추고 나무들이 만들어준 그늘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머리가 조금 정리되자 며칠 동안 잠시 눌러두었던 감정들이 조금씩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원망에 섞인 감정이 들었다. 굳이 뉴욕에서 잘 사는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와선 일 년도 되지 않아 계획을 바꾼 회사에 좋은 감정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잠시일 뿐이었다. 물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지'라는 성숙한 마음 때문은 아니었다. 애초에 회사라는 곳에 '인간미'나 '배려'같은 걸 기대하지 않은 탓이 컸다. 다음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렇다면 이런 회사를 선택하고 이직한 나의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 또한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번 직장으로 이직을 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예전 회사 기존팀이 와해되면서 나는 원하지 않던 팀으로 옮겨가야 하는 상황에 놓였었다. 그래도 원한다면 다닐 수는 있었겠지만 사실 이직의 가장 큰 이유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타이틀과 높은 연봉이라는 때문이었다. 회사 자체의 프로젝트는 내가 추구하는 바와 달라서 고민을 많이 하고 옮긴 곳이었다. 애초에 내가 들어간 포지션이 개별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보단 회사 내의 새로운 팀 구성하고 조직 구조를 개편하는 역할이었기에 고민 끝에 옮기에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존에 안 해보던 일이기도 하고 새로운 팀을 짜고 회사의 미래 성장을 위한 계획은 세우는 일은 꽤나 재미있었다. 하지만 B2C(Business to Customer) 즉, 일반 고객을 상대로 하는 프로젝트와는 달리 내가 옮긴 회사는 100% B2B (Business to Business) 기업을 상대로 한 프로젝트만 하는 곳이었다.
학교 졸업 후에 계속 마케팅 쪽에서 근무하며 구글, 나이키, 삼성, 닌텐도등 많은 글로벌 브랜드와 일하며 정말 크리에이티브하고 재미있는 프로젝트들을 해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많이 배우고 너무 재미있었지만 그만큼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고갈되는 일들이었다.
방황은 계속된다
'그래, 그동안 신나게 일하고 흥미로운 프로젝트 충분히 해봤으니 이제 몸이 좀 편한 곳으로 가보자! 그리고 매니지먼트의 역할도 좀 배워봐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이 회사에 옮겼는데 하루가 다르게 이 회사에 얼마나 다녀야 하나 그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몸이 편하려고 이직을 했더니 마음이 불편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내 구미에도 딱 맞고, 돈도 많이 주고, 사람도 좋은 직장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나는 디렉터라는 타이틀이 익숙해질 만큼의 커리어를 쌓고 나가겠다는 마음에 '버티기 모드'로 전환하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잠시 버틴다고 해도 이제 40대를 시작하는데, 지금 내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진로 걱정, 커리어 걱정을 마흔이 가까워져서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디자인처럼 전공이 확실하고 어느 정도 커리어가 쌓이면 그냥 자연스럽게 다음단계로 넘어가서 성장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주변을 봐도 나이에 상관없이 자신의 길을 고민하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게 뿌연 안갯속에 있는 듯 앞이 보이지 않아서 헤매던 20대의 방황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지금 있는 이곳에서 버티라면 몇 년은 더 있을 수 있지만, 과연 이게 맞는 길일까? 나의 10년 뒤는 어떤 모습일까?" 40대를 눈앞에 둔 나의 방황은 이런 느낌이었다. 20대부터 나름 열정을 다해 살아왔지만, 아직은 불안정하고 어설프게 이룬 것들 위에서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만 흔들리고 있는 느낌. 20대처럼 격하게 흔들리고 있지 않아 티는 나지 않지만, 단단해 보이는 그 속에선 마음의 지진이 일어나고 있는 느낌.
이렇게 버티는 게 인생인지, 아니면 또 다른 도약을 위한 잠시의 흔들림인지, 나는 여전히 답을 찾아 헤매는 과정 속에 있다.
무념무상
예전 첫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을 때는 경력이 얼마 안 된 상황이라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정말 걱정에 잠도 못 자고 미친 듯이 일을 찾아서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나는 LA로 터전을 옮겼었다. 아, 덧붙이자면 그때 나를 해고한 디렉터 말이 맞았다. 나는 그 사건을 계기로 훨씬 더 좋은 직장으로 옮기게 되었고 지금도 나를 먹여 살려주는 고마운 프로젝트들을 포트폴리오에 넣을 수 있었다.
'그래, 이번에도 다시 해보는 거야!' 나 나름대로 스스로에게 충분히 쉴 시간을 주었다고 생각하고, 다시 각오를 다지려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 의지도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충분히 쉴 시간을 주지 않았나?" 이런 생각을 하며 며칠을 더 쉬어도 마음은 그대로였다.
"이제 네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야."
"나 파업에 들어갔거든."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의지는 내 마음에서 언제든 그냥 만들어지는 것인 줄 알았다. 언제나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지, 뭔가 하고 싶은 게 없는 게 문제였던 적이 없던 나였다.
사람이 없는 숲 속 외진 호수가 근처를 찾았다. 두세 명쯤 앉을 수 있는 길이의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아 잔잔하게 물이 흐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일이라 그런지 꽤 오랜 시간 인적은 없었고 그 덕분에 나는 깊은 생각 속으로 빠져들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짧은 시간 속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빠의 뇌출혈, 갑자스럽게 얻게 된 나의 병, 팀의 와해. 회사 이직, 회사 해고까지. 이 모든 게 일 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이번이 다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는 마음의 소리가 그제야 분명하게 들렸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다시 전 속도로 달리겠다는 불타는 의지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용기,
꼭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의 위로,
이게 바로 내가 필요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