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한 삶의 온도를 찾아서.
엄마, 긴 휴가 얻었다고 생각해
아빠가 재활병원에 입원한 지 몇 달쯤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혼자 밥은 잘 챙겨 먹는지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아침, 저녁으로 전화를 걸던 때였다. 엄마는 그날따라 힘든 하루였는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끝없는 하소연을 쏟아냈다. 한참 엄마와 관계 재정립을 하던 때에는 "나는 엄마의 감정쓰레기통이 아니야!"라는 굳은 각오를 가지고 아마 그 소리를 다 듣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족 응급사항이니 아닌가. 꾹 참고 그냥 들어주기로 했다.
한참을 쏟아 붙더니 조용해진 내가 느껴졌는지 엄마도 말을 멈추었다.
"엄마, 그냥 긴 휴가라고 생각하는 건 어때?"
물론 그냥 마음 편한 휴가는 될 수 없을 것이다. 아빠는 여전히 몸의 왼쪽 부분이 마비된 상태이고 인지능력도 기적에 가깝게 돌아왔지만 80% 정도 수준까지만 회복되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요일과 날짜등 숫자나 특정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가끔, 아니 자주 횡설수설 이상한 말들로 엄마의 속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그래도 살아나게만 해달라고 기도한 게 엊그제같이 생생하지 않은가. 그저 함께 할 시간을 더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고 우리는 힘든 일에만 집중하고 또다시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여기려 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간병을 해보았고 잠시였지만 한국에서 엄마의 생활을 따라다니다 보니 정말 몸과 마음이 지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우리 아빠는 쉬운 사람이 아니다. 병원에서만 주는 밥을 그냥 먹을 수 없는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었고 요구사항도 많은, 참 간병하기 힘든 환자였다. 여기에 더 상황을 악화시키는 건 그냥 대충 할 수 없는 엄마의 성격. 병원에서 유명할 정도로 지극정성으로 아빠를 챙기고 병실의 환자들의 반찬까지 해대는 참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생각의 한 끗 차이
멀쩡하던 남편이 저렇게 반신 마비가 되어 병원에 있는데 '인생 방학'이라니. 엄마는 처음에 황당해했지만 내 눈에는 엄마 인생에 다시없을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느꼈다. 엄마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희생'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엄마의 가족들, 아빠의 가족들을 챙기는 건 죄다 엄마의 몫이었고 거기에 까다롭기로 유명한 아빠와 살아오느라, 그리고 병주머니를 달고 태어난 '나'라는 여린 존재를 세상밖에 설 수 있게까지 만드는 그 모든 과정에는 행복이나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엄마는 이제 자유부인이야!
아빠는 최선을 다해서 재활하고 있지만 나이가 있으셔서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도 적고 '어느 정도'까지 나아지는데 적어도 2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이 시간을 슬프게만 보낼 수도 있고, 생각을 조금만 달리해 나에게 주어진 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떠난 커다란 집이 외롭고 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빠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오실 것이고 지금의 이 소중한 휴가도 끝이 있는 것이다.
평온한 하루
한동안 전화를 걸 때마다 물었다.
엄마, 방학 계획은 잘 세우고 있어?
방학은 신나게 보내고 있어?
방학 금방 간다 엄마.
지금 부지런히 즐겨야 돼!
농담반 진담반 얘기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엄마가 잠시라도 자유롭고 행복한 날들을 보내길 바랐다. 아마 그 뒤로 시간이 한참 지난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다시 병원진료를 위해 한국에 잠시 가서 엄마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네가 나를 살렸어."
엄마가 말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 한참 무기력과 우울감에 빠져들고 있었는데 그때 내가 해준말이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조금 생각을 바꿔보니 내 인생에 이렇게 아무도 신경 안 쓰고 자유로운 날이 다시 올까 싶었다고 말했다. 아빠도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회복을 하고 있으니 나도 이 귀중한 시간을 잘 즐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날 그렇게 엄마와 평범하게 먹는 저녁이 참 소중하다고 느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충분해, 그거면
아빠의 재활병원에는 보호자들이 멀리서 지켜볼 수 있도록 커다란 유리창문이 있다. 아빠가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면회도 되지 않던 시간이 있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은데 토요일 하루만 면회가 허락된 게 너무 속상했다. 언니와 함께 저 멀리서 얼굴이라도 보자며 매일 병원을 찾아갔었다.
그때는 아빠는 시력이 회복되지 않아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근육질의 아빠가 앙상해진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재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치료해 주시는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 한쪽 양말이 내려갔는지 그걸 올리려고 잘 움직이지 않는 팔로 끊임없이 허공을 휘젓는 아빠가 보였다.
계속 안쓰럽게 내려간 양말을 올리려 고군분투하는 아빠의 주변으로 시선을 옮겨보았다. 전신이 마비되어서 눈만 움직일 수 있는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젊은 환자가 보였다. 온몸을 보조끈으로 묶고 몸을 세우는 재활과정이라고 하는데 지금 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었다.
아마도 최소한 휠체어에라도 앉아서 의사표현이라도 할 수 있게 해달하고 기도하지 않을까? 나중에 아빠에게 들어보니 그때 아빠의 소원은 보조기구를 달고라도 재활환자용 러닝머신에서 두 발로 걸어보는 것이었다고 했다.
아빠의 재활 과정을 지켜보며, 그곳의 수많은 환자들을 지켜보며 나는 생각했다. 삶은 너무 뜨겁지 않아도 된다고. 활활 타오르다 나 자신까지 태워버린 '열정'이나 너무 멀리 있어서 언제나 현실을 만족하게 하지 못한 '꿈'같은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을 만족하고 이 순간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사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깨달음을 잊고 싶지 않다.
또다시 삶의 적절한 온도를 지키지 못하는 날이 오면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무 뜨겁지 않아도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