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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Mar 07. 2024

12_건강한 백수 생활을 위하여

그동안 갈고닦은 무기를 꺼내라

노는 것도 부지런히


참 사람이 잘 안 변한다. 시작할 땐 분명히 '나는 방전 상태니까 이제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야!' 이렇게 다짐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도 직접 눈으로 보고 나 자신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가만히 누워서 쉬는 걸 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억지로 그걸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타입이다.


그래, 어차피 목표는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는 거 아니겠어? 내가 가장 충전이 될 수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 일들로 하루를 채워보자.


이미 프로 번아웃러로서 꽤 경력이 된 나는 나를 힐링해 줄 수 있는 무기 몇 가지를 가지고 있다. 멘틀이 무너지지 않고 지금 여기까지라도 올 수 있었던 건 바로 나만의 이런 삶의 무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를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때로는 그 안에 파고들어 세상밖의 고단함을 잊으려 노력했다. 이렇게 쓰고 나니 뭐 대단한 무기를 발견한 것 같지만 사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것 들이다.


산책

독서

운동


하지만 이 단순한 세 가지가 나에게는 현재의 나를 있게 해 준 은인 같은 존재이다. 유난히 마음속 방황을 많이 하던 나에게 조용하게 음악을 들으며 혼자 걷던 그 시간은 치유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던 시절에는 책을 펼쳤고 그 안에서 대답을 달라고 매달렸다. 혼자 지어준 삶의 무게에 무너질 것 같던 나를 지탱해 주던 것은 매일 몸을 움직이며 생각을 멈출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이었다.


위기상황이다


역시, 그동안 방황하며 산 게 다 허툰 시간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나는 나의 무기 중 첫 번째 가장 친숙한 '산책'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회사에서 나오기 전부터 나의 몸의 여러 군데에서 고장신호를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원인은 스트레스가 쌓여갈수록 그 생각을 잊어버리려 더 혹독하게 운동한 데에서 시작된 것 같다. 정신적으로는 나를 살린 운동이었지만,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무식하게 운동을 하다 몸의 여기저기가 고장 나기 시작한 것이다.


몸에서 가장 먼저 이상을 보인건 무릎이었다. 디자인 공부를 하던 시절, 학비를 벌겠다고 너무 지나치게 일을 한 탓에 조금만 무리해도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한동안 좋아하는 달리기를 하지 못했고 오랜 시간이 지난 3년 전에 다시 뛰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 달리는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고 그 덕분에 이번엔 무릎뿐 아니라 허벅지와 골반을 이어주는 부분까지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산책을 아예 할 수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엔 벌써 10살이나 되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에너지를 자랑하는 멍멍이, '애구'()라는 아이가 있다. 이 녀석 덕분에 좋든 싫든 무조건 아침저녁으로 산책을 나가야 했기에 최소한의 산책 시간은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무기였던 '산책'은 조금 다른 성격의 것이었다. 나는 힘든 일이 있으면 마치 내가 순례자의 길을 걷고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시간을 정해두지 않고 위로가 되는 음악을 들으며 한없이 걷고는 했다. 인적이 최대한 없는 숲 속이나 공원이어야 했고 길이 쭉 이어져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발을 옮길 수 있는 그런 곳이어야 했다.


그래, 책이 있잖아!


짙은 안갯속에 있는 듯 끝을 모를 방황에 힘겨워하던 시절에도, 이별 후유증으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던 때에도 나에게는 기댈 수 있는 책이 있었다. 가슴을 울리고 나를 위로해 주는 문장 하나라도 찾은 날에는 그 문장을 곱씹고 또 곱씹으며 다시 살아볼 힘을 얻었다. 책은 나에게 가장 큰 선생님이며, 친구이며, 가야 할 방향을 인도해 주는 나침판 같은 존재이다.


책이 눈에 안 들어와.


와, 나 시력까지 잃은 것인가. 아니, 정작 눈은 잘 보이는데 흰 것은 종이고 검은 것은 글씨로 보이는 그 시기가 온 것이다. 책을 좋아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눈은 책을 향해있지만 마음으로 읽어지지 않으니 힐링이 될 리가 없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시간이니 나를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강력한 무기 세 가지 중 두 가지가 후보에서 탈락했다. 게다가 3년 전에 새로 '나의 힐링 세트'에 영입되었던 글쓰기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당연한 것이었다. 마음이 어딘가 붕 떠있으니 그걸 생각을 정리하며 기록으로 옮기는 글쓰기가 될 리가 없었다.


아,

이건 정말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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