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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은 디자이너 Mar 02. 2024

10_너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자기 위로의 한걸음을 내딛다.

와, 너 진짜 대단하다!


나는 타인의 숨겨진 장점이나 가능성을 잘 발견하고 그걸 표현하는 성격이다. 특별히 그러려고 노력한 적이 없는 걸 보면 그냥 타고난 성향인 듯싶다. 평범함속에 숨어있는 누군가의 특별함을 알아차리는 것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작은 원동력이 된다면 그건 나에게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몇 년 전 회사에서 한 성격검사 결과도 이것과 동일하게 나왔다. 누군가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걸 지켜봐 주고 함께 키워가는 것에 특출한 재능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가 나 자신에게는 이렇게 후하게 칭찬해 준 게 언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나는 자존감이 낮은 편은 아니다. 아마도 20살까지는 자신감과 자존감, 둘 다 낮았던 걸로 기억한다. 매사에 소심하고 의존적이던 성격에 자존감이 높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타지에서 내 두 발로 한 걸음씩 내 인생을 개척해 나가며, 나는 나 자신을 믿고 존중하게 되었다.


아마도 믿으니까 나에게 더 엄격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

그러니까 나 자신을 더 사랑하려면

더 노력하며 살아야 돼."


과거의 나를 바라보며


바쁘다는 핑계로 이사 올 때 함께 가져왔던 상자 중 일부를 그냥 옷장에 박아두었었다. '이참에 상자정리나 해볼까?' 갑자기 시간이 많아진 나는 그제야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오늘 정리하고 싶을 만큼 하고, 안되면 또 내일이든 모레든 언제든 마음 내킬 때 하면 되지 뭐.' 무기한 휴가를 주기로 결심한 나는 시간의 압박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미국에 와서 이사를 자주 다녀서 그런지 그렇게 짐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부에서 서부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 다니면서도 여전히 나와 함께 한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남들에겐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만의 일기장과 생각을 여과 없이 적은 낡은 노트들이 들어있는 상자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바닥에 앉아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나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고생 많았네 진짜.'


혹시라도 무너질까 봐 미래에 대한 다짐을 써 내려간 글들이 가득했다. 무모한 꿈을 찾아 멀리 떠나 왔지만, 현실은 역시나 쉽지 않았다. 이제 다 지난 일이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일기를 읽으니 그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꿈을 찾게 해 달라는 간절함이 담긴 글에는 눈물이 났고, 하루를 꼼꼼하게 살아내려 발버둥 쳐도 쉽게 풀리지 않는 현실에는 짠함이 느껴졌다.


이걸 다 내가 했다고?


나의 열심의 흔적은 집안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나와 7년이나 함께 동거동락했던 노트북이 있다. 지금은 진작에 은퇴하고 그 수명을 다했지만, 함께 고생한 기억에 나는 여전히 이 노트북을 책상 서랍 한편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오랜만에 꺼내 전원을 켜보니 이 녀석 영영 세상과 작별한 모양이다. 작은 불빛하나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이대로 보낼 순 없어서 여기저기 알아보니 배터리 문제일 수도 있다고 해서 급하게 아마존에서 새 배터리와 연결 전선을 구입했다.


Welcome back!


아, 다행이다. 비록 부서진 뒷면 때문에 덜커덩하며 노트북 뚜껑이 열었지만, 다행히도 전원이 들어왔다. 이런저런 폴더를 열어보다 'Design Project'라는 폴더가 보였다. 그 안에 그동안 내가 회사일을 제외하고 따로 진행했던 사이드 프로젝트들이 폴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프로젝트 이름을 딴 각 폴더마다 그 안에는 'Concept Development' 'Inspiration' 'Layout' 'Modeling' 'Branding' 등등 수많은 이름의 폴더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계속 폴더를 열고 들어가 보아도 또 폴더가 있고, 그 안에는 수많은 디자인 파일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수천 개, 아니 수만 개 될지도 모르는 끝도 없는 파일을 한참 둘러보다 보니 새삼 놀라웠다.


이게 다 내가 한 거라고?


그 파일 하나하나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는지 잘 알기에, 그 많은 작업물들을 내느라 수고했을 나 자신이 보였다. 잠시나마 내가 이렇게 쉬어도 되는지 고민을 한 나를 반성했다. 작업 파일을 천천히 둘러보며 나 스스로에게 말해주었다.


열심히 살아줘서 고마워.

덕분에 지난날에 후회가 없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도,
좋아할래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과거의 나는 나를 믿고 신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 두 발로 당당하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20대에는 여린 마음에 아주 작은 바람에도 정신없이 흔들리는 내가 싫었고, 가끔 자신의 뿌리가 아주 깊게 땅속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만나면 궁금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내면을 가지고 살아갈까? 저런 마음도 노력으로 되는 걸까? 어쩌면 그저 타고난 것은 아닐까?


나의 이런 성격을 바꾸고 싶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랐다. 그저 내가 닮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워가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내가 찾은 발견한 그들의 공통점은 스스로에 대한 엄격함이었다. 엄격함의 뒤에는 당연히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성실함이 있었다. 이런 매일의 노력이 그들을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이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때 내가 몰랐던 사실이 있다. 그들도 흔들리며 그냥 그 자리를 버티고 산다는 것을 말이다. 때론 흔들리고, 가끔 자신에게 여유를 주면서 삶의 균형을 잡고 사는 것이다.


또한 무언가를 해내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존재함으로써 내가 귀중 한 것이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나는 나로서 가치가 있다. 이런 존재 자체에 대한 인정이 그들을 땅속 깊이 뿌리내리게 해 준 것이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까지는. 아무리 통찰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도 또 쉽게 망각해 버린다. 또다시 예전 습관처럼 돌아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지금은 그동안 열심히 살았던 나를 인정해 주는 걸로 시작해 보려고 한다.


그리고 자꾸 되새기려 한다.


열심히 쫓기듯 살아야만,

무엇인가를 성취해야만 좋은 하루가 아님을.


그저 숨 쉬고 좋은 것을 보고 느끼고 감사할 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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