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아주 천천히, 그렇게 가도 괜찮다.
모든 것엔 균형이 중요해
여러 번의 번아웃 완치 시도는 매번 실패했지만, 이 경험들을 통해 나는 나의 성향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모든 병의 치료는 원인파악이 먼저라고 한다. 나의 번아웃의 원인이 무엇인지 몇 년간 생각하고 내가 내린 결론은 아래와 같다.
언제나 한계까지 나를 몰아붙이는 성격.
적당히 무심할 줄도 알아야 하는
인간관계에 너무 마음을 쏟은 점.
쉬어야 할 순간에도 이유 없는 죄책감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은 것.
도전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목표만 바라본 것.
몸과 마음의 소리를 무시한 일.
사실 코로나 때도 이런 나의 성향을 모르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바뀌었음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삶을 의무나 책임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찰나의 순간같이 짧은 우리의 삶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끝날수 있음을 마음으로 깨달았다. 잘 산다는 게 어떤 뜻인지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기존에 내가 살던 방식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일단은 모든 걸 멈추자
고맙다고 해야 할까. 내가 회사에서 예고 없이 나가게 된 시기가, 모든 것이 조금은 느려지는 뜨거운 한여름이었다는 사실이. 다들 휴가를 떠나고 더운 날씨에 지쳐서 뭔가 느슨해져 있는 시간이었다. 왠지 모르게 나도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도 될 것 같은 이상한 위로가 되는 계절이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처음으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생각이라는 걸 해보려고 해 봐도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어쩌면 이번 번아웃 치료는 내가 원하든 아니든 나의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살면서 처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의욕이라는 것이 생기지 않는 시간이 온 것이다.
최선을 다하면 큰일 나요
언젠가 김영하 작가님이 어느 프로그램에서 한 말이다. '아! 정말 그러네! 아, 왜 난 진작 몰랐을까.' 하며 이 말을 곱씹어 보고 또 생각했다. 그는 우리는 에너지의 100%를 쓰고 살면 안 된다고 했다.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해 70-80% 정도만 쓰고 살아야 한다고. 뒤돌아보니 나는 100%도 모자라서 미래의 에너지까지 잔뜩 끌어와 다 소진해 버린 기분이었다.
과거의 나는 욕심은 많은데 방황을 많이 한 탓에 가야 할 길도 멀고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다. 인생에도 에너지 총량의 법칙이 적용한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다르게 살았을까? 그저 '열정'이나 '꿈'만 있으면 에너지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나온다고 믿었던, 그런 무모한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이제와 후회해 봤자 지나간 일이었다. 또한 과거의 내가 했던 선택이나 삶의 방식은 그때의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을 것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고, 지나온 나의 20, 30대의 선택 중 크게 후회되는 일이 없다. 그러니 이제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부터 좋은 선택을 하면 되는 것이다.
소진 상태
어렵게 돌고 돌아왔지만 나는 인정했다. 지금 나의 상태는 '쉼'이 필요한 상태임을. 이것은 과거의 내가 했던 잠시의 그런 휴식이 아니라 어쩌면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는 여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휴대폰도 완전히 방전이 되면 훨씬 더 오랜 시간 충전을 해야 그제야 전원이 들어오듯, 나에게도 그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일단 전원이 나가버린 나의 뇌를 쉬게 해 주기로 했다. 산책을 하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살아가기.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그냥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 날들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만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며 말이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매일 얘기해 줬다.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이제 정말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을게.'
'편안한 쉼을 마치고 다시 돌아오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