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디자이너들은 연봉에 만족할까
현실은 다르단다 친구야
내가 한참 경제학도로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두 명 모두 디자인 전공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시작한 친구들은 매일 화실에 간다며 뭔가 있어 보이는 검은색 화구통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었던 나는 어린 나이에 뭔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찾은 친구들이 대단해 보이기도 하고 그 재능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과는 거리가 먼 나였기에 내 인생에 저런 예술가의 삶은 절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디자인 전공을 하고 현직에서도 일하던 두 친구는 지금 디자인과는 연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 정작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미국에서 디자이너로 산지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난 이야기지만 그 당시 내가 듣던 친구들의 연봉이나 근무환경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산업 디자인을 전공하던 친구와 그녀의 동기들은 언제나 아침 8시가 되기 전에 출근했고, 밤 10시나 11시 정도 퇴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물론 더 늦게까지 근무하는 날도 꽤 있었고 주말에도 회사에서 필요하다면 수시로 작업을 해서 보내야 했다. 또 다른 친구는 대학에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하고 업계로 나간 지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완전히 다른 진로로 방향을 바꿨다. 왜 그만뒀냐는 나의 질문에 그 친구가 나에게 한말이 생각난다.
친구는 "살기 위해서"라고 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기에 얼마나 그림 그리는 걸 사랑하고 본인들이 했던 디자인 작업에 열정적이었는지 알고 있다. 무엇이 그녀들을 이토록 진절머리 나게 하고 결국 업계에서 떠나게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 한 가지는 노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보수였을 것이다.
나는 디자이너로 한국에서 일해본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근무를 하다 유학 온 대학원 후배들을 통해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나도 한번 한국 가서 일해볼까?'라고 물으면 다들 현실을 잘 모른다는 표정으로 경험담을 얘기해주곤 했다.
모르는 게 약이었구나
내가 갑자기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친구들에게 조언을 얻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친구들도 그 나이에 자신들이 아는 것을 나에게 말해주었을 것이고 그 디자이너의 현실을 들은 나는 시작도 해보기 전에 아마 마음을 접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당시 순진하게도 그저 꿈이라는 걸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것 하나만 믿고 그 험난한 디자이너의 길로 접어들었다.
학교에 다니던 시절 나의 생활은 친구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벽까지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 밤을 새우고 매일 아이디어 구상과 디자인 작업 생각만 하고 살았다. 하지만 그 당시 내가 부러워하던 친구들처럼 나의 마음은 열정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으니 몸의 피곤함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드디어 디자이너로 처음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두근두근!
첫 출근이다!
길고 먼 길을 돌아서 왔기에 나의 첫 직장은 너무 소중했다. 뉴욕에서 디자이너로 취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연봉 같은 건 주면 그냥 넙쭉 '감사합니다!‘ 하며 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 당시 오퍼레터에 쓰여있던 금액은 $42,000이었다. 요즘 환율로 하면 5,600만 원 정도이다. 그때는 Benefit Package라고 부르는 미국 회사에서 제공하는 각종 혜택이 담긴 패키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 패키지 안에는 기본 연봉을 제외하고도 고려해야 할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그때 레터에 사인하기 전 여러 가지 고민을 상담해 주던 선배에게 연봉이 괜찮은 건지 물어봤더니 나쁘진 않다고 했다. 회사가 아주 마음에 들고 그쪽에서도 너를 좋게 본 거 같으면 $3,000 정도 높여달라고 요구하라고 했다.
이것이 나의 인생의 첫 연봉협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작 그거 더 달라고 얘기하고 너무 긴장해서 메일을 일분에 한 번씩 확인하던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 몇 시간 뒤 온 대답은 너무 심플했다. "오케이! 그럼 $45,000에 계약하자!" 마음 졸이던 게 조금 허무해지는 순간이었다.
첫 연봉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도 연차가 쌓이면서 친한 후배들, 가르쳤던 학생들이 연봉에 대해 자주 물어온다. 처음 취업하는 학생들은 기준점이 없기에 그냥 오퍼레터를 나에게 보내며 확인을 부탁하기도 하고, 연봉을 이만큼 불렀는데 잘 모르겠다며 연락이 오기도 한다. 대학원 졸업생들이기에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전공을 바꿔서 들어왔기에 사실 그냥 주니어 디자이너로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이들이 받는 금액을 들으면 10년 전 내가 받았던 것보단 확실히 많이 나아진 것 같다. 회사마다 그리고 개인마다 다 다르지만 보통 $60,000에서 $70,000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요즘 환율이 높아서 인지 8천만 원에서 9천만 원 정도의 금액이다. 물론 이것은 뉴욕 디자이너 기준이고 살인적인 물가를 고려하면 당연히 높은 금액은 아니다.
월가에서 일하는 금융 쪽 종사자들이 보면 참 소박해 보이는 초봉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디자인이라는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 대가로 안타깝게도 금융계나 법률, 의료 종사자들 같은 아주 높은 고액의 연봉을 받는 분야가 아니다. (물론 스타 디자이너가 되거나 고위 관리급이 되는 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하지만 실망하기는 이르다. 첫 연봉은 말 그대로 시작점일 뿐이지 대부분 디자이너들은 회사를 옮기며 계속 몸값을 올린다. 한 회사에서도 10-20% 인상을 받을 수는 있지만 매해 그렇게 인상을 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의 경우는 1-2년에 한 번씩 이직을 하며 계속 연봉을 높여간 케이스이다. 경력이 10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첫 직장에서 받은 금액의 4배 이상을 받을 정도로 연봉을 높였다. 물론 이걸 금액으로만 보면 수억 대 연봉을 받는 디자이너!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미국의 높은 세금률과 말도 안 되게 비싼 월세를 뺀 나머지를 봐야 하기에 이 또한 보이는 금액처럼 많은 건 아니다.
네? 이 금액으로 된다고요?
최근 어린이 책 몇 권을 쓰며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와 일해본 친한 지인이 말했다. 미국에서도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봤는데, 한국인들이 제시한 가격이 미국 프리랜서들의 십 분의 일 수준이었다고 말이다. 가끔 이런 걸 보면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미국에서도 많은 한국인 디자이너를 만나지만 그들은 대부분 실력이 좋은 편이다. 같은 한국인이라서 하는 말이라기보다 기본적으로 감각도 좋고 가지고 있는 재능도 뛰어나다.
앞서 말했듯이 엄청나게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디자인이 아니라 개인 사업을 하거나 금융 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난 업계 사람들도 큰 부를 쌓고 싶어서 이 일을 선택했다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 우리는 월세 또는 매달 나가는 대출 이자, 각종 생활비를 스스로 충당해야 하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당연히 일한 대가로 받는 연봉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내가 업계에서 만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연봉에 나름 만족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어느 정도의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업계나 경험에서 나온 것이므로 미국 디자인 업계 전반을 대표하진 못한다. 디자인도 그 안에 다양한 분야가 있고 미국 회사도 에이젼시인지 브랜드 쪽인지에 따라 꽤 큰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들이 받는 대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많은 정보를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정보가 한정되어 있을지라도 우연히 어느 한국의 꿈 많고 재능 있는 젊은 디자이너가 그걸 보고 영감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다. 많은 노력으로 멋진 디자이너가 된 인재들의 뛰어난 재능이 더 넓은 곳에서 펼쳐지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