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일하며 느낀 야근에 대한 생각들
철야가 뭐예요?
미국에서 같은 디자인 회사에 함께 일했던 선배 디자이너가 있다. 2년 전쯤 미국에서 꽤나 긴 이민 생활을 마치고 가족들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갔다. 일을 그만두고도 가끔 만났기에 한국으로 떠난 뒤에도 종종 문자로 연락을 하곤 했다. 미국에선 쭉 전시 공간 디자이너로 일했지만, 한국에선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해본적이 없는 내가 회사생활이 궁금해서 물어보면 대답은 항상 일관됐다.
"한국 절대 오지 마 ㅋㅋㅋㅋ"
평소에는 그냥 웃고 지나갔지만 그날은 정말 궁금했다. 실제
일의 강도를 묻는 내게 선배는 야근은 일주일에 수시로 하고, 철야도 지금까지 20번은 넘게 했다고 말했다. 나는 철야가 뭔지 물어보았다. 밤에 근무하는 것을 철야라고 하는 건 알았지만, 디자인 회사에서 철야근무는 다른 의미가 있는지 해서였다. 하지만 내가 알던 의미와 같았다. 구글에 검색해 보니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새워하는 근무'라는 의미라고 나온다. 보통 밤 10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근무하는 걸 의미한다고 한다.
나에게 더 충격이었던 건 철야근무를 하고 그다음 날 쉬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클라이언트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간다고 했다. 한국에서 일하다 미국에 유학 온 후배들에게 들었을 때는 ‘그래도 몇 년 전 일이니까, 지금은 더 나아졌겠지. 또는 이 친구들은 주니어 디자이너였으니까 대우가 더 안 좋았겠지’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선배는 경력이 15년은 되는 시니어 디자이너가 아닌가. 그리고 현재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기에, 지금 당장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뭔가 더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떤가?
미국이란 곳이 워낙 크고 디자인의 분야도 다양해서 이번에도 나와 주변 지인들의 경험만을 떠올려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우선 나의 경우는 일의 강도가 세다는 에이젼시에서 주로 일해봤고, 대기업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도 근무해 봤다. 처음 디자이너로 근무할 때 좋은 프로젝트로 포트폴리오를 빨리 채우고 싶어서 일부러 더 많은 일을 자청해서 하곤 했다. 또한 내가 LA에서 근무한 마케팅 회사의 팀은 회사 내에서도 일이 많기로 유명한 팀이었다. 그런 우리 팀도 철야라는 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말 예외적으로 밤새 설치해야 하는 프로젝트의 현장감독을 가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그날 오전만 근무하고 쉬다가 밤에 현장에 가서 아침까지 일하고 그다음 날은 당연히 휴무였다.
급한 프로젝트가 있으면 가끔 밤 10시 정도까지 야근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그동안 야근한 걸 고려해서 4시 정도에 퇴근하곤 했다. 뉴욕에서 근무한 다른 디자인 에이젼시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가끔 밤 9시나 10시까지 근무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급한 프로젝트 때문에 이렇게 늦게까지 근무하는 일이 잦아지면 팀의 디렉터가 유연성 있게 프로젝트 마감 뒤 하루나 이틀 정도의 개인 휴가를 주었다. 또한 저녁에 늦게 퇴근하는 디자이너들의 경우 보통 10시가 넘어야 출근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건 하청업체라 불리는 에이젼시 디자이너들의 스케줄이었고, 브랜드의 인하우스로 들어가면 야근이라는 개념이 많이 사라진다. 흔히 말하는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를 맞춰줘야 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나 같은 경우는 보통 5시가 조금 넘으면 퇴근했다. 물론 시기마다 프로젝트가 몰리는 때가 오고 이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힘을 합쳐 프로젝트 완성에만 집중한다. 이런 시기가 끝나면 에이젼시와 마찬가지로 디렉터의 재량으로 팀원들에게 며칠의 휴가를 주거나 다음 프로젝트 전, 한 일주일에서 이주는 느슨하게 일하며 머리 식힐 시간을 준다.
물론 디자이너마다 자신이 원하는 완성도가 있기 때문에, 개인에 따라서 회사에서 시키지 않아도 혼자 밤에 작업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콘셉트를 만들고 아이디어를 짜는 건 사실 '끝'이라는 개념이 없다.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손으로 작업을 안 할 뿐이지, 머리는 계속 프로젝트 생각으로 가득 찬 경우가 많다.
무엇이 우리를 야근하게 만드는가?
내가 주니어 디자이너일 때는 그저 단순히 회사 일이 많아서 야근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회사 저 회사 옮겨 다니며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작업해 보고, 스타일이 다른 디렉터들과 일해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야근도 불가피한 경우가 있고, 충분히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정말 부득이한 경우는 회사의 운명을 좌우할 절대 ‘갑’ 클라이언트가 요구하는 일이 있거나, 예상치 못한 프로젝트가 갑자기 몰려와 야근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런 경우는 일 년에 자주 있지 않고, 나에게 꼬박꼬박 소중한 월급을 제공해 주는 회사의 운명이 달렸으므로, 그냥 머리 박고 열심히 해야 한다.
이와는 다르게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디렉터나 프로젝트 매니저의 효율적이지 못한 방식 때문에 야근해야 하는 케이스가 있다. 내가 일을 정말 잘하는 디렉터와 일할 때 느낀 점이 있다. 자기 팀원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다른 부서나 윗사람과 의사소통에 뛰어난 디렉터는 절대 필요 없는 야근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디자이너의 업무 방식을 이해 못 하는 다른 팀과 능동적으로 소통하며, 디자이너의 편에서 업무량을 조절해 준다. 디자이너들을 가장 지치고 의욕이 떨어지게 하는 건, 관리자의 판단력 부족이나 윗사람의 지나친 에고(Ego), 또는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 능력 부족으로 해야 하는 야근이다.
나의 경우에도 디자이너들을 지켜주려 애쓰는 디렉터 밑에서 일할 땐, 부득이하게 야근을 해야 되는 경우가 오면 내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연장 근무를 했다. 또한 그들은 절대 자기 권한으로 프로젝트 마감일을 정해서 통보하지 않았고, 실제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디자이너에게 먼저 물어보고 조율한 뒤 다른 팀과 소통했다.
원래 그런 건 없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한국 디자이너들이 야근에 대해 의견을 나눈 글들을 찾아 읽어봤더니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디자이너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디자인 업계가 다 그래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뜻은 이해할 수 있다. 이제 막 들어온 초보 디자이너들에게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고, 또한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너무 깊게 발 담그기 전에 떠나라는 이미 뼈를 묻은 자의 가슴 따듯한(?) 충고 같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나의 선배가 얘기해 줬듯 한국의 디자인 업계도 점점 많이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수많은 능력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이 일을 말도 안 되는 야근이나 철야 같은 근무 환경 때문에 그만두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원래 그런 일' 따위는 없다. 우리가 그저 원래 그래왔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시되는 것뿐이다. '너는 너의 일을 사랑하는 디자이너니까, 열정을 다해 몸이 부서져라 일해야 하는 거야.'같은 것이 원래 그런 일이 되면 안 된다. 물론 '나라는 한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한다고 뭐가 바뀌겠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서서히 바뀌고 있는 한국의 디자인 업계도 이런 작은 생각과 목소리가 모여서 변화하고 있는 걸 아닐까 생각한다.
원래 그렇다고 받아들여지는 디자이너의 야근 문화가 개선되고, 창의적인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에 맞는 대우를 받고 일하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