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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미쟤씨 Jan 23. 2022

페미쟤씨의 유방암 분투기

페미쟤씨는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늘 그렇듯 매해 지겹게도 갱신하는 지난해 여름 더위가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줄만 알았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콘서트 피켓팅에 성공했음에도 그걸 포기해야 하나 싶을 만큼 몸이 좋지 않았고, 올림픽공원을 걷던 길목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진정시킬 정도로 컨디션이 떨어지고 가슴 바깥으로 종양이 크게 드러났을 때에야 비로소 내 선에서 감당할 수 없는 몸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독립과 홀로를 외치던 페미쟤씨, 암환자가 되다.     


 암이라는 병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의 나는 홀로로서의 가능성을 꿈꾸던 비혼, 비출산을 결심한 30대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선언하며 살아왔다. 가뜩이나 한국사회의 팍팍함에 지친 나는 무기력에 늘 시달려왔으며 금방 지치고 너무 피곤해 일이 안되고 몸을 제대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이 생겼다. 그저 홀로의 존재로 살기엔 팍팍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다가도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통증으로 찾아간 병원은 내게 (주로 여성이 병증의 다수를 차지하는) 유방암이 원발암이 되어 다발성 전이까지 진행되고 있다는 통보를 했다. (암의 일반적인 증상이 체력저하와 무기력증이라고 한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구제적으로 어디가 얼마만큼 아픈 건지 머리속에 입력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절망하거나 슬퍼할 새 조차 별로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병증의 인지 이후는,   충격-분노-절망-무기력 등의 단계를 거친다고 하는데 평소 무기력이 너무 깊었던 탓인지 충격-정신없음-얼떨떨함-피곤함을 오가며 수긍의 상태로 넘어가버린 케이스가 나였다. 그동안 내 상태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3주 넘게 입원해 수많은 과를 전전하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콜이 오면 무조건 나가 검사와 치료를 반복하며 배액관과 호흡기를 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정상성’의 틀에서 보는 페미쟤씨     

 오랜 치료와 안정을 위해 병원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내 병증을 받아들이는 것 보다 더 힘든 피할 수 없는 상황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가족들의 걱정’ 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기’였다. 내게 병원생활은, 무료함 보다는, 적어도 며칠 길게는 몇 달을 프라이버시가 보장될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동시에 함께 지낼 사람에 대해 전혀 선택권이 없는 곳이었다.(1~2인실도 있지만 여전히 병원이라는 특성상 프라이버시의 문제는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했으며, 금전적 또는 그 밖의 다양한 이유로 며칠 이상 이용해 본 적은 없다.) 가뜩이나 사회적 에너지를 충전하기 위해 혼자의 시간이 필요한 내향성 다분한 본인은 (무던한 척 했지만) 병이라는 것으로 묶여 서로를 반드시 의식하며 지내야 하는 나만의 공간이 없는 병원생활이 매우 쉽지 않았다. 가족은 생각보다 나의 상황을 나보다 훨씬 버거워했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대하곤 했으며, 왕래가 잦지 않던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걱정을 이유로 환자에게 병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기도했다. 병원에서 만나는 낯선 이들은 내가 어디가 얼마만큼 아픈가(놀랍도록 병세를 가지고 불행배틀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하곤 했으며 나이, 결혼 여부나 남자친구(!) 유무 등의 사적 정보를 당연스럽게 질문하곤 했다. 몇 번 비슷한 패턴의 질문을 겪고 나서 나는 꽤 자주 베드에 커튼을 쳐버리고 눈을 감고 눕고 싶다는 생각만이 들곤 했다. (이어폰이 정말 내 구원자였다!)     

 혹자는 나를 두고 ‘결혼도 안하고 돌봐줄 남자친구 하나 없이 아파서 딱한 젊은 여자.’ 혹은 ‘(있지도 않은) 남편이나 남자친구 고생시키지 않아서 다행이다(?).’ 등의 맥락으로 나를 불쌍히 여기기 서사에 집어넣곤 했다. 더 환장할 마무리는 ‘금방 치료받고 이겨내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이라는 얼렁뚱땅 케이드라마 마지막회적 덕담으로(?) 마무리가 되곤 했다.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없는 말들은 잠시만 견디면 지나간다는 생각에 대충 들어주곤 했지만 문득, 대답할 의무가 없는 것에 대응을 해야 하는 나와 세상이 이해하는 나에 대한 존중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여성의 인생에는 (당연히) 보호자가 필요하다.’ 라는 이상한 말들은 현실과는 좀 괴리가 있어보였다. (같은 병동의 많은 기혼 여성 환자들에게 짜증을 내며 나가버리는 남성 배우자는 여전히 얼마나 많던지.) 걱정을 빙자한 ‘여성의 삶’ 에 대한 정상성 규정은 예나 지금이나 나로 살아가는 가장 큰 어려움인 것이다. 사회보장제도가 젊은 여성 1인 가구에 얼마나 취약한지 단적으로 드러나는 경험이기도 했다. 병원에서의 나는 여전히 치료를 받으려면 보호자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 많았고, 직계가족 외에는 보호자로 인정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아픈 사람이 되고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는 나를 어떤 틀에 두고 규정하는 것이 아닌 존중으로 맞닿는 사회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사회적 인식을 벗어나 정작 더 중요한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가 있을까. 예전보다 예측이 어려워진 고통을 관리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경제적인 문제와 부담을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였다. 치료로 인한 나의 외모적 변화는 사실 부차적인 문제였다.          


홀로를 위해 함께 모여준 친구들 : 페미쟤씨 삭발식     


 ‘6:4로 대충 가른 커트머리, 맨얼굴에 새빨간 립스틱만을 바르고 다니던’ 페미쟤씨는 암이 충격이 아닌 일상이 되어갈 무렵, 항암제의 부작용인 탈모 덕에 그동안 시도해 본 적 없는 외모적 변화를 겪어야 했다. 2차 항암 이후 예정된 탈모에 주변 사람들은 걱정의 의미로 최대한 삭발을 미루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정작 본인은 하루하루 듬성듬성 빠지는 머리카락이 너무 거슬려서 빨리 삭발을 하고 싶어 했다. 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시도한다는데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다. (삭발 당시만 하더라도) 이전의 나의 삶에서 생각지도 못한 변화를, 슬픔이나 상실감과는 다르게 흥미롭게 받아들이는 암환자가 생각보다 많을텐데 왜 막상 찾아보면 찾기 쉽지 않을까(최근엔 암생존자들의 일상을 담은 유투브 채널이 생겨 호응을 얻고 있다.)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암환자가 겪는 감정은 늘 상실과 절망과 슬픔이 가득하지만은 않을텐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아픈사람들을 위축되게 만드는걸까. 암생존자 개인이 겪는 다양한 감정과 여러 가지 생각들을 삭발식을 통해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필요 이상의 걱정도 안심시킬 겸, 잘 가시화 되지 않는 삭발 여성에게서 오는 외모적 스테레오타입에 대한 이야기를 개인적인 소회와 함께 털어놓고자 하는 의도이기도 했다.     

 ‘2차 항암을 앞둔 현재 지난하고 한 치의 앞길을 알 수 없는 투병의 날들 속에서 지치고 힘든 것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즐거운 의미 또한 찾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치료에서 삭발 퍼포먼스를 통해 삭발의 사회적 의미를 찾아보고 그를 통해 나, 페미쟤씨의 개인으로서는 어떤 의미를 찾아 삭발인으로서 살아갈지 즐겁게 고민해보고자 한다. 아직도 닥친 모든 현실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본인은 투병의 시간이 어쩔 수 없음이나 잃어버린 시간이 아닌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페미투병러로서 페미니스트가 바라보는 나의 질병을, 지금보다는 조금 가볍게 헤쳐나가고 싶다.’       

 이런 요지로 병원 침대에서 메신저로 끄적인 기획의도에 동의해 준 주변의 사람들은, 각자의 능력과 상황을 동원해 삭발식을 실시간 스트리밍 할 수 있었다. 남들 앞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 나로서는 좀 쑥스럽고 끊임없이 말해야하는 압박감에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다행이도 생각보다 그 방송을 본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리뷰를 공유할 수 있었다.     

내가 굳이 삭발식을 공개적으로 한 이유는 단순하다. 암은 숨겨야 할 것이 아니고, 슬퍼만 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막상 닥쳐야 내 병을 알게 되었던 나처럼, 암과 함께 생존하는 나의 태도를 걱정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고 보여주는 건 중요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많은 격려와 지지를 얻었다.      

    

유방암(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분투기 : 페미쟤씨는 과연 잘 살 수 있을까     

 약 반년의 기간동안 나는 꽤 운이 좋은 편이었다. 병증에 비해 치료가 잘 되었고 차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암생존자들은 ‘암과 싸워서 이겨내라, 희망을 잃지 말라’ 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사실 이미 만성환자나 말기 환자에게 암은 싸워 이겨낼 수 있는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나 또한 수많은 만성적 질병과 아픈 사람 스펙트럼 안에서 이상한 희망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암생존자로 겪는 온갖 타인과 내가 만든 편견과 당황스러운 낯섦과 부딪치며 살게 될 것이다.      

꼭 암을 겪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픈 사람으로 사는 것은 확실히 여러모로 신경써야 할 것이 많은 불편한 삶이다. 이전과는 다른 삶을, 고민을, 때로는 상실을 겪고 겪을 것이다. 혼자서 헤쳐나갈 수 있는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것들을 환자 주변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신체적 불편함이 가져오는 사회적, 경제적 불편함들을 제대로 꺼내놓을 수 있는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사회는 생각보다 더 아픈사람들을 불편하게 여기며, 이는 아픈사람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 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소박한 비혼식을 계획하고 있다. 거의 아무 것도 없이 주변에 공수표만 뿌리고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나는 나의 자리에서 어떤 내가 겪는 것들과 인생의 지향점을 나의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길 기대하고 있다.      

 건강이 걸어온 브레이크가 오히려 내 몸의 한계를 받아들이게 했고, 인생의 불안함과 유한함은 역설적으로 나의 가능성과 인생에 가치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의 신체적 한계는 나를 좀 더 현재에 충실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갈 수 있을까. 나의 고민을 꺼냈을 때 함께 고민할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민의 에너지를 잃고 싶지 않다.           


*위의 글은 독립출판잡지 <계간홀로> 14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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