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운명

by 수경

오래전에 내 손 끝에서 긴 편지 한 통이 태어났다. 수신인이 연세 많은 엄마라 글자 크기도 큼직했다.



우리 언니는 훨씬이라는 수식어를 매번 첨가해야 할 만큼 똑 부러지게 야무지고 빼어나게 예쁘기도 했다. 엄마의 자부심 같아 보였다. 나는 늘 한 박자 늦었고, 언니 뒤에서 허둥대고 어설펐다.



언니와 둘이 있으면 엄마는 늘 언니 편으로 판정을 내리고 내게 양보를 권했다. 나는 잡다한 일을 더 많이 하고도 군소리는 더 듣는 쪽이었다.



아프고 속상한 마음 어쩌지 못해 왕래를 삼갔던 적이 있다. 편지는 상처 난 마음 누르고 삭이고 어루만진 끝에 피어난, 한 떨기 홍매화 꽃잎 같이 떨렸다. 편지는 이제 목적지로 가야 했다.



마침 언니가 와 있었다. 식탁 위에서 얌전히 엄마를 기다리던 편지는 엄마에게 곧장 가지 못했다. 언니를 거쳐, 언니 마음속을 훑고 지나간 뒤 두 갈래로 북북 찢어졌다. 화도 언쟁도 없었을 뿐, 나는 편지의 운명이 거기까지라 생각했다.


수신인은 엄마였지만 언니가 목적지가 되어도 좋았다. 어디든 퍼질러 앉아 하소연하면 족할 일이었다. 편지는 그렇게 자기 운명을 다했다.



훗날, 언니는 언니를 꼭 닮은 첫째 딸과 나를 빼닮은 둘째 딸의 엄마가 되었다. 똑 부러지고 욕심 많은 첫째와 그 밑에서 치이는 둘째를 보는 마음은 예전과 달랐을 것이다. 언니 마음을 흐르고 적셨던 것, 그때 짧은 운명의 편지는 그렇게 자기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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