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형식 없는 결별에 대하여
평전은 글쓴이를 감화시킨 역사적 인물에 대해,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한 객관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주관적 평을 담은 글쓰기의 한 양식이다.
당대 현실을 재구성하고, 인물의 말과 행동, 외양에 대한 묘사를 상상하여 그리는 데는 작가의 상상적 역량을 한껏 펼칠 수 있는, 다분히 문학적인 글쓰기이다.
<조광조 평전>의 작가 이종수는 국문학과 미술사학의 전문가로서 인문과 예술을 결합한 독특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력이 십분 발휘되어 <조광조 평전>을 통해 독자는 잘 쓰인 한 편의 문학 작품을 대하듯 미적 감동과 문학적 여운을 얻게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작가는 군신을 넘어선 두 사람의 정을 한 생을 함께 통과해 온 연인의 결별처럼 안타깝게 그려내고 있다.
하고많은 인물 중에서 작가로 하여금 조광조의 평전을 짓도록 한 그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조광조의 무엇이, 중종실록을 비롯한 객관적 사료 앞에서 애써 무게 중심을 잡는 그를 사뭇 기울어지게 만든 것일까?
책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저자의 기울어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현재 시점에서도 조광조의 인품에 감화되어 그 울림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조광조는 중종조, 조선의 유교 국가 실현을 위해 실천을 강구한 급진적 정치개혁가이다. 중종에게도 임금 자리를 빚진 반정 공신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였는데, 1515년 조광조 나이 34세에 알성시에서 이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간언의 초임 간원 조광조는 자신이 속한 부처의 장관을 포함한, 언관을 탄핵하는 상소를 시발점으로 개혁의 돌풍을 일으킨다.
조선시대에는 구언제도가 있었다. 구언에 응하여 올린 상소에 대해서는, 그 내용이 군주의 무능을 일깨우고 정치의 무도함을 꾸짖는다 해도 절대로 벌하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었다. 이것은 언로를 막지 않기 위함이었다.
여기에 신씨복위상소에 대해, 대사헌 권민수와 대사간 이행에 대한 탄핵을 조광조가 주장하고 나섰다. 이 사건으로 구언을 통한 언론 확보의 중요성을 일깨운, 조광조의 원칙이 중종에게 받아들여졌다.
도덕적 원칙 앞에서 힘 있는 공론이 형성되어야 실질적 개혁이 가능한 일임을 두 사람은 모두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공납 문제의 해결 등 일련의 개혁들이 다소간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몽주에서 김굉필로 이어지는 조선 유교의 도통을 체계화하는 일까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격서 혁파 사건에서 중종과 조광조 사이에 미세한 틈이 벌어진다. 임금을 위한 간언이 아니라 군주를 정면으로 겨냥한 듯한 상소 앞에서 중종은 심하게 흔들린다. 자신을 위한 신하인지, 자신의 학문을 군주보다 더 사랑한 마음에 대한 의심과 서운함 때문인지 중종의 마음속에 큰 지진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1519년 조광조 생애 마지막 개혁에서 조광조는 중종의 버림을 받는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중종과 조광조의 마음속을 드나들며 그 이유를 가늠한다. 이상주의자인 조광조의 버림받음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절절한 안타까움은 문학적으로 표현된다.
상대가 무엇을 더 요구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건넬 만한 것이 없다고 느꼈을 때 이별은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조광조에게 거듭 내렸던 승진의 은혜를, 그것을 통해 얻었을 권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권력의 달콤함으로도 길들일 수 없는 신하에게 중종은 군주로서의 큰 비애를 느꼈던 것일까. 권력을 구걸하지 않은 신하 조광조에게 더 이상 건넬 게 없는 중종의 구차함으로 저자는 조광조를 옹호하고 그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야심한 밤을 틈탄, 당사자의 얼굴도 비치지 않은 급작스런 중종의 이별 통보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형식이 배제된 그간의 믿음과 사랑을 초라하게 만든 허망한 것이었다. "
유배지에서 사사의 명을 받은 조광조의 죽음에 대해 중종실록 또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일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것 같다."
조광조 사후 중종은 조광조가 구상했던 모든 정책들을 원래대로 되돌린다. 그리고 중종이 승하한 후 조광조의 명예를 돌리는 복권이 허락되고 선조 1년에는 영의정으로 추증, 2년 후에는 문정공의 시호가 내려진다. 그 후 스승 김굉필과 함께 문묘에 종사되어 유학자의 최고 반열에 오른다.
왜 조광조인가. 그는 타고난 자질과 이상의 크기 그리고 이상과 일치되는 삶의 태도를 아우른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서책이 아닌 정치 한복판에서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려 했고 조선의 정신과 그 방향을 현실적으로 고민했던 인물이다.
이것이 저자로 하여금 조광조 평전을 집필하게 한 그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조광조의 시대는 현실의 하늘과 그의 이상이 끝내 한 지점에서 만나지 못한 시대였다. 그 간극 속에서, 형식을 잃은 이별은 믿음이 깊었던 만큼 더 비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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