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8월의 하늘 아래
까맣게 탄 개미 한 마리
빨랫줄 같이 사선으로 기운
불타는 하얀 길을 걸어간다.
물방울도 이슬도
수증기도 없이,
땡볕과 불볕이
쏟아지는
불 없이 불타는
폭풍 같은 길
망망대해 그 길 위에
배롱나무
꽃이 피었다.
소나기와 무지개가
뽀글뽀글한 꽃잎을
터트린
폭죽 같은 꽃.
그 꽃 아래에서
개미는 이제 쉬어가도 되겠다
한 번은 웃어도 좋겠다
마른하늘에 톡톡 튀는 물방울
여름 한복판에
배롱나무 꽃이 웃고 있다.
폭이 넓은 개울은 한 번에 건너갈 수가 없어서 징검다리가 놓여 있습니다. 지금의 여름은 더위와 열기가 너무 가혹하여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를 건너기 위해서도 징검다리 같은 장치가 필요한데, 제게는 배롱나무가 여름이라는 강물에 놓인 징검다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롱나무는 7월 중순부터 9월 말, 길게는 10월까지, 100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100일 동안 핀다 하여 별명처럼 불렸던 '백일홍나무'가 백일홍, 배기롱, 배롱. 이렇게 소리가 점차 변해 배롱나무가 되었습니다.
배롱나무는 타는 듯한 여름의 열기 속에 선명한 붉은빛으로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름의 뜨거운 광선 아래 이만큼 싱그럽게 피어나는 꽃은 거의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배롱나무는 오래 앓아 지친 얼굴에 생기를 더해주는, 붉은 립스틱 같은 인상을 주는 꽃입니다.
태양의 직사광선도 마다하지 않는 배롱나무는 어떻게 여름을 택해 꽃을 피울 수가 있었을까요? 배롱나무는 중국 남부와 인도차이나 반도가 원산지라고 합니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보다도 더 덥고 습한 여름이 오래 지속되는 곳입니다. 배롱나무는 오래전 고향에서 자란 습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여름을 택해 자신의 꽃을 가장 화려하게 피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배롱나무는 따뜻한 남부지방에서 정원수로 많이 심어졌고 겨울에는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매끄러운 줄기는 짚으로 감싼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은 기후 변화로 인해 중부 지방에서도 배롱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배롱나무의 꽃은 가지 끝에서 원추 모양의 꽃차례로 피는데, 한 개의 꽃눈이 대개 2~3일 동안 개화를 지속하는 동안, 다시 연이어서 새로운 꽃눈이 꽃잎을 열어 100일 동안 개화 상태를 이어가게 됩니다. 배롱나무 꽃은 40여 개의 수술과 1개의 암술을 6장의 뽀글뽀글하게 주름진 꽃잎이 감싸고 있습니다. 붉은색과 파마를 한 듯한 뽀글한 모양이 마른 대기에 붉은 점을 찍어 생기를 더 불어넣고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홍자색 꽃 외에도 흰색 꽃이 피는 흰배롱나무와 자주색 꽃이 피는 자주배롱나무가 있습니다. 배롱나무는 한여름의 싱그러운 꽃 외에도 줄기의 수피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배롱나무를 식별하는 기준이 됩니다. 수피에 껍질이 거의 없어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듯한 매끈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수피가 없는 배롱나무는 더위에 옷을 벗은 것처럼 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나무입니다. 그리고 수피를 벗은 나무줄기의 모양이 마치 속세의 모든 짐을 벗어놓은 것과 닮아서인지 예로부터 절간에 즐겨 심은 나무이기도 합니다. 전라남도 강진의 백련사와 순천에 있는 송광사, 선암사 등 오래된 사찰에는 배롱나무 노거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30여 년 전만 해도 여름이라는 계절은 더위와 한판 신나게 뒹굴면서 건강하게 날 수 있는 계절이었습니다. 지금의 여름은 함께 장난치며 뒹굴 수 없을 정도로 그 열기에 우리는 압도당하고 있습니다.
시원한 물 한 잔과 수박과 팥빙수로 열기를 식히고 나무 그늘과 긴 처마 밑에서 뜨거운 빛을 피하면서 우리는 여름의 긴 강을 한 뼘씩 건너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배롱나무가 징검다리처럼 중간에 서 있어서 웃을 수 있습니다. 배롱나무도 저도 함께 웃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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