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간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때 도청에 회의가 있어서 갔다가 함께 참석한 지인과 차를 한 잔 하게 되었다. 나보다 10살 이상 연배가 높은 은행의 지점장님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지점장님, 제가 요즘에 몸이 썩 좋질 않아요. 가슴에서 몽우리 같은 것도 만져져서 사실은 얼마 전에 유방암 조직 검사를 하고 왔어요.”
라고 말했다.
가볍게 걱정되는 마음을 전달했을 뿐이었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지점장님은 갑자기 제주에 자기가 잘 아는 자연치유 의사가 있다며 소개를 해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데이터가 확실한 현대 의학을 더 신봉하는 쪽이지만 현대의학도 아직 암을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TV에서 보면 말기 암 환자였음에도 산에 들어가서 몇 달 살았더니 암이 깨끗이 사라졌다는 사람들도 있고, 땅에서 나는 음식을 치료제로 삼아 몇 달 먹었더니 암이 깨끗하게 사라졌다는 사례들도 있었다.
의심이 많은 나는 자연치료로 암이 나았다는 것은 소비자를 현혹시키기 위한 업계의 상술이라 여겼으며 아주 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암환자가 되어 생존율을 따져보니 지금 내가 현대의학이고, 자연치유고 뭐 가릴 것이 없는 처지였다.
현대의학에서 제시하는 표준 치료 이후에도 암이 재발, 전이되는 확률이 여전히 높았으며 그렇다면 암은 현대 의학의 표준 치료로 완치되는 병이 아님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연구 데이터도 부족한 자연치유를 맹신하는 것도 정답은 아니었다.
일단 자연치유가 뭔지는 알아봐야 될 것 같아서 표준 치료 전까지 남은 일주일 동안 찾아가서 상담을 해 보기로 했다.
제주도에 이런 자연치유 센터가 있다는 것은 지점장님의 도움 아니었으면 절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자연치유가 뭔지도 몰랐고, 건강할 때는 내가 암 환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해 본 일이 없으니 말이다.
겉으로는 젊고 건강해 보이는 나를 마주한 자연치유 한방 의사는 내가 상담실에 앉기가 무섭게 내 몸에 생긴 암의 원인에 대해 잘 못된 식습관과 생활습관 때문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질책하듯이 말이다.
“평소에 물은 많이 드세요?”
“물이요?... 아뇨.”
실제로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물을 세 컵 이상 의식적으로 마셔본 적이 없었다. 어릴 적엔 학교에서 나오는 우유 한 컵, 밥과 함께 먹는 탕이나 찌개의 국물이 내가 마시는 하루의 수분이 대부분이었다.
목이 말라 물을 찾아서 마신 건 하루에 한 컵, 많으면 두 컵 정도도 되지 않았다. 중, 고등학생 때부턴 각종 탄산음료와 과당이 첨부된 음료수로 물을 대신했으며, 성인이 된 후엔 아침에 일어나면 물 대신 차나 커피를 마셨고, 목이 마르면 시원한 맥주로 갈증을 달래곤 했다. 생각해 보니 살면서 물은 따로 신경 써서 챙겨 마셔본 적이 없었다.
“우리 몸은 70프로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무하고 똑같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몸에 물이 부족하면 어떻게 되지요?”
“몸속에 노폐물이 쌓이나요?...”
“네. 물론입니다. 그리고 물이 부족하면 사람은 죽습니다.”
머리를 강하게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의사는 우리 몸에 질병이 생기는 원인에 대해서 독소와 노폐물이라고 설명했고, 독소와 노폐물이 우리 몸을 산화시켜 염증을 발생시키고, 염증 지수가 높아지면 혈관 질환이 생기고 암도 생기는 것이라 했다.
몇 권의 자연 치유 책에 밑줄 친 내용들을 보여주면서 인체의 메커니즘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더니, 우리 몸은 나무와 똑같아서 물을 마시고, 양질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햇볕을 받고, 바람을 쐐야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내 몸을 나무라 생각하니 자연치유의 원리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인간도 나무처럼 적당량의 물을 마시고, 양질의 음식을 영양소로 섭취하고, 햇볕을 받고, 바람을 쐬면 왠지 병에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이미 오랜 기간 그렇게 살지 않아서 암이라는 손님이 몸속에 자리 잡았지만, 자연의 섭리에 맡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의사의 논리는 꽤 설득력이 있었다.
암은 체온이 낮은 환경을 좋아하고, 면역은 장에서 시작되므로 심부 체온을 올리고 장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나는 마치 사이비 교주한테 홀린 듯 자연치유 의사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며 내가 암에 걸리게 된 이유를 되짚었다.
판매하고 있는 복부 온열기를 구매하라며 권유하기 전까지 말이다. 암은 뜨거운 온도를 싫어하니 고주파 치료로 종양의 크기도 작아지게 할 수 있다며 고주파 치료도 받으라고 권했다. 독일의 연구 결과 데이터까지 들이대며 고주파 치료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니 더욱더 그럴싸했다.
두 시간 넘게 자연치유에 대해 열변을 토한 의사의 정성을 봐서라도 복부 온열기는 사지 않을 수 없었고, 살기 위해서 좋다는 건 전부 시도해보겠다는 생각에 고주파 온열 치료도 예약을 잡고 돌아왔다. 아직 항암을 시작하기까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더 이상 종양이 커지지 않도록 유지하고 싶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암세포가 하루 만에도 쑥쑥 자라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삼 년 전 유방 초음파 검사를 했을 때 보이지 않던 종양이 삼 년 만에 2.6CM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내 몸속의 암덩이가 초고속 스피드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아직 항암 치료를 시작하기까지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성실하게 자연치유 센터에 있는 고주파 치료기계에 종양이 있는 오른쪽 가슴을 맡겼다.
마사지 샵에서 사용하는 기계로 보였는데, 독일에서 사용하는 암 환자 치료용 고주파 기계와는 모양새가 매우 달랐다. 마사지 샵에서 사용하는 미용을 위한 기계로 내 몸을 덥힌다고 하니, 그게 무슨 효과가 있겠나 싶으면서도 종양이 더 커지지는 않겠지라고 생각하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계에 몸을 맡겼다.
마치 다리미로 내 몸의 상부를 여기저기 문지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치료사는 나이가 지긋이 든 여성 마사지사였다. 암이 무슨 뾰루지도 아니고 미용 기계로 어떻게 종양을 없앤다는 건지…
마음속에서는 미용용 고주파 기계에 대한 저항감과 불안감으로 혼돈의 파장이 점점 더 커지는 듯했다. 순간순간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들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항암 치료 전까지 하루하루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