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맘의 비애
‘내가 왜 암에 걸렸지?’ 유방암 진단을 받은 첫날부터 지속적으로 멈출 수 없던 생각이다.
암 진단을 받자마자 ‘원인이 뭘까?’에 대해 떠올리자 의심할 여지없이 바로 힘들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전 남편과 이혼하기 전, 아이만 데리고 제주로 내려와서 별거 기간을 가졌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다른 여자가 생긴 전 남편과의 이혼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아이를 생각하면 아빠 없이 자랄 아이가 걱정이 돼서 섣불리 이혼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가 세 살 밖에 되지 않았을 시점이라 조금 더 성장한 후 충분히 혼자서 키울 자신이 생기면 그때, 이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여자가 생겼어도 아이한테 아빠 역할은 해 달라고 요구했다.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말라는 나의 울부짖음에도 전 남편은 아이를 외면했다. 주말에 단 5분 만이라도 전화 한 통씩만 규칙적으로 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 마저도 몇 번 하더니 아예 아이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아빠를 그리워하는 아이를 보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세 살짜리 아이를 아프게 한 어른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이의 아빠라는 사실, 내 남편이었다는 사실이 더 기가 막혔다. 전 남편에 대한 분노는 물론이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어서 늘 마음이 무겁고, 기분이 우울했다.
아이를 데리고 혼자 살아갈 길이 막막해서 두렵고 불안했다. 혼자서 어떻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를 매일 고민하느라 밤 잠을 설쳤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픈 곳 없이, 아빠 없이 자란 티 나지 않도록 밝게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함께 어울리고 아이가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도록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관광지나 명소에 찾아다녔다. 육아와 경제활동에 지쳐서 에너지가 바닥이 났을 때에도 말이다. 지금까지 이런저런 핑계로 하지 못했던 대학원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제주도에 내려오자마자 대학원에 등록하여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분투했고, 고생 끝에 논문도 써냈다. 오전에 아이가 어린이 집에 가면 나는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고, 오후에 아이가 돌아오면 그때부터 양육은 시작되었다. 함께 놀아주고 밥 먹이고 씻기는 일 등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불안한 엄마의 영향인지, 아이의 예민한 성향 때문이었는지 일찍 잠을 자지 않는 아이 덕에 밤 11시가 지나야 오롯이 내 시간이 생겼고, 그제야 나는 책이라도 볼 수 있었고 과제라도 할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해 서울에서 하던 기업체 강의 일도 다시 시작했는데 강의 준비를 하다 보면 새벽 2,3시에 잠자리에 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말 치열하게 살아왔다.
지난 10년만 돌아보더라도 암에 걸릴 충분한 이유가 설명되었다. 그래도 정확한 원인을 알아야 암을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연히 힘든 시간을 지나왔다고 모두가 암에 걸리지는 않는다. 세상에 나보다 치열하고 힘들게 산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다면 세상사람들 모두가 암에 걸렸을 것이다.
왜 어떤 이들에겐 암이 침궐하고, 어떤 이들은 멀쩡한 것일까? 뭔가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평생 술을 마시고 평생 담배를 피워도 암에 걸리지 않고 70,80 대까지 건강한 사람들도 많다. 물론 타고난 건강체질이야 하늘이 주는 것이니 타고난 약골인 내가 견줄 바는 아니지만, 유전성이 원인이 되는 암은 전체 암의 10프로도 되지 않는다. 암은 후천적 요인에 의해서 발생할 확률이 90% 이상이다.
그 후천적인 요인을 차단하면 암은 예방될 수 있는 병이고, 나 같이 이미 암이 발생한 사람들은 전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몸의 환경을 바꾸어 주면 치료가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실제로 암 진단을 받은 후 20년 넘게 잘 생존해 있는 사람들도 많고, 3개월 또는 6개월을 선고받은 말기 암 환자들도 몸속 암세포를 싹 없애고 생존해 내는 사례들도 있다.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날들이 후회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키고,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았고, 나는 성장했다. 다만 지금까지 나의 건강은 돌보지 않고 살았다.
기름기 가득한 마블링 소고기와 레드 와인을 마시는 것이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에 대한 보상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몸만 힘들게 했던 게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했고, 지친 상태에서 마음의 휴식이라는 건 생각할 여지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암이라는 손님이 몸속에 찾아온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