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은 동전의 앞뒷면
"췌장은 아무 이상 없이 깨끗합니다.”
의사는 ‘이렇게 깨끗한 췌장을 갖고 병원엔 왜 왔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검사하러 올라올 정도의 환자에게 너무나 깨끗한 췌장이 달려있다는 것이 수십 년 넘게 췌장을 봐온 의사에게는 의아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간엔 약간의 섬유화 현상이 관찰되는데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추적 검사를 통해서 진행 여부는 확인이 가능합니다.”
‘이 오버쟁이. 그러게 네가 무슨 췌장암이야? 말도 안 돼. 가족력도 없는데… 복통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췌장암일 리가 없지.’
헛웃음이 나왔다. 1년 안에 죽는 줄 알고 딸아이 양육과 상속에 대한 문제까지 걱정하던 내 처지가 안타까웠다. 검사 결과만 기다리던 요 몇 주 동안 췌장에 암 덩어리가 생긴 것처럼 소화가 안 됐었는데, 체증이 싹 내려가는 듯했다.
‘자 그럼 이제 자궁만 괜찮으면 되는 거다.’
CA19-9 수치는 췌장암 종양지표 수치이지만 종종 자궁에 용종이 있으면 수치가 높게 나올 수 있다고 검진 센터 의사는 말했다. 자궁의 용종이야 한국 여성 대다수가 갖고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산부인과 의사는 난소의 용종이 크기가 커서 의사 입장에서는 수술을 권하고 싶지만 환자들은 수술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지금 당장 급한 수술은 아니니 나중에 문제가 되면 보자는 애매모호한 답변만을 남긴 채 서두르듯 진료를 마쳤다. 병원에 환자가 얼마나 많던지 아침 일찍부터 간담내과와 산부인과 두 곳에서 진료를 보고 나니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3월의 서울은 꽃 샘 추위 때문인지 바람이 차가웠다. 높은 빌딩이 별로 없는 제주에 살다가 아주 오랜만에 서울에 오니 모든 빌딩이 마천루처럼 보였고, 마치 외국에 여행 온 듯 서울이 낯설었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서울 사람인데 말이다. 제주에 살게 된 지 5년이 지나서인지 나는 이제 제주가 내 집이고 고향 같았다. 어서 빨리 내 집이 있는 제주로 가고 싶었다.
일단 췌장암, 간암, 자궁암은 아니라니까 나에겐 삶의 시간이 좀 더 주어진 셈이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마천루 사이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 오늘도 살아서 저 하늘을 볼 수 있음에 얼마나 감사한가…’
한 동안 찾지 않았던 신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감사합니다. 살아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열두 번은 울부짖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돌보지 못 한 나 자신을 하염없이 사랑해 주기로. 이번 췌장암 해프닝을 계기로 짧게나마 인생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정말 바쁘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왔다. 좋은 딸이었고, 좋은 엄마였고,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웃음과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곳엔 흔쾌히 도움을 주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고민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렇게 좋은 사람 이려고 노력하면서 정작 나 자신은 살뜰하게 돌보지 못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나 스스로에게 ‘지금까지 살아오느라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칭찬해 주었다. 췌장암도 간암도 자궁암도 아니라고 분명히 확인했으니 내 몸은 가뿐하고 날아다닐 것 같이 기분이 좋아야 마땅했는데, 나는 여전히 몹시 피곤함을 느꼈고, 추웠고, 컨디션이 썩 좋지 않다는 생각을 떨굴 수가 없었다.
비행기 시간이 좀 남아서 공항 옆에 있는 대형 쇼핑몰에 들렀다. 오늘을 기념할만한 무언가를 나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어서 무작정 주얼리 샵으로 향했다. 40년 넘게 살아오면서 내 스스로 사치품을 사 본적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젊었을 땐 뭇 남성들에게 선물도 받아보고, 결혼할 땐 예물도 받았지만, 아이 출산 이후로는 목걸이나 반지를 받아본 적도 사 본 적도 없었다. 아끼고 절약하고 안 쓰고 살았던 지난 10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전남편의 명품 양복과 넥타이는 사 줄지언정, 내 옷은 백화점에서 사 입지 않았다. 아이에게는 고가의 유기농 식품을 먹일지언정 내 몸뚱이 위해 좋은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살았다.
오늘은 그 간 살아오느라 애쓴 내 자신이 살짝 처량하기도 하고 무얼 그리 억척같이 살았는가에 대한 회의도 들었다.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발견하고는 가격은 보지도 않고 지갑에 있던 신용카드를 꺼내 과감하게 일시불로 결제를 했다. 영수증에 찍혀 나온 금액은 과히 놀라웠지만 40년 넘게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나에게 반짝거리는 목걸이 하나 정도는 사치가 아니었다. 이혼 후 처음으로 내 스스로에게 선물을 하며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키운 아이가 드디어 열 살이 되었고, 하마터면 췌장암으로 생을 짧게 마감할 뻔했던 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