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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게을리 Jun 28. 2017

독일이야기2

플랜B가 없는 삶

다른사람들이 보기엔 '참 하고싶은대로 사는' 인생인 것 같아도, 난 사실 매우 안정적인 결과를 추구하는 타입이다. 호주 워홀이나 휴학계를 내고 했던 비영리 인턴 등 남들이 보기에 쟤 왜저러지 했을 경험들도 사실 내 머릿속에서 취업이라는 '안정적인' 결과에 도움이 될거라는 확신이 없었으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자체에는 어느정도 도전적인 면들이 있고 그것이 정말 흥미롭고 재밌었던건 팩트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저질러버리는' 나의 모습과 내가 느끼는 '뒤지게 많이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참 갭이 크단 말이지.

아무 생각없는 사진


이를테면 난 500원을 잃어버릴까 무서워서 카지노 가면 공짜로 받은 바우처 말고는 쓰질 않는 타입이고, 같은 이유로 주식 펀드 등 원금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것들에는 아예 손도 대지 않는다. 복권은 기부라고 생각하기에 그냥 원하는 곳에 기부를 하는 편이고. 그러고보니 대학 지원할때도 가/나/다 군 모두 하나라도 떨어지면 큰일날 것 같아서 하향지원 하기도 했더랬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빈말이든 진담이든 나에게 해주는 '참 알수없다' '맘대로 산다' 라는 단어들이 내가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지만 그게 좋아서 굳이 내 사고방식을 얘기한 적은 없었더랬다. 그런데 독일에 와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두번 세번 다시 깨닫는것 같다.

어떤 사람이냐면 독일어를 못해서 핸드폰 데이터 충전하러 알디까지 20분 걸어가야 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고해성사처럼 떠오른 지난날 나의 결정들과 그 근거들. 빠른년생이 아니었다면 생각조차 안했을 워킹홀리데이, 안전빵으로 돌아갈 곳이 있어야만 그만뒀던 회사들, 마찬가지로 가야할 곳이 있을때만 갔던 여행. 지금도 사실 휴직자의 신분으로 독일에 와있는 것이니 내가 그간 했던 선택과 1도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고 독일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생각없이 노는 독일의 젊은이들

여태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그런 삶의 방식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기서 처음으로 그게 내 발목을 잡고 있구나 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도무지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계획이 세워지지가 않는다. '돌아가지 말자' 라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보려고 해도, '혹시?' '어떡하지?' 라는 물음들에 안전한 계획을 찾게되고 그러면 완전히 도돌이표가 된다.


어제 만난 독일인은 나보다 한살 어렸는데 5년동안 여기서 공부만 했단다. 앞으로 1,2년동안 공부를 더 할 생각이라는데 본인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한 치의 의심이나 불안도 없는 그 모습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니 나이면 한국에서는 학생이면 안 될 나이야...! 라고 속으로 얘기해봤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가장 부질없고 쓸데없는것.. 나는 나한테 오지랖을 부리는 한국이 싫다고 수천번을 얘기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살고있는걸 어떡하나? 가만히 있어도 속에서 그럼 결혼은? 연봉은? 뭐? 학사를 한다고? 등등 온갖 오지라퍼들이 훈수를 두느라 난리가 나고, 그러면 폭풍 검색으로 구글이 불이 나고 곧 엄청나게 많은 양의 초콜렛을 소비하고 딱히 좋은 결론 없이 침대로 향하는 그런 오후들을 보내고 있지. -.-;;


하리보국의 밤

아마 여기서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계획을 짠다고 하면 그것이야말로 내 인생 최초의 무모한 선택일 것이다. '쟨 무슨생각이야' '참 하고싶은대로 사네' 라는 평판에 걸맞는 그런 선택을 드디어 할 지도 모르는데 (이것도 확실하게 쓰면 왠지 안 될것 같아) 나만 불안하고 내 주변 사람들은 다 안 불안해..! 난 원래 그런가보다 하고 모두 안심하고 있어..! 심지어 엄마마저도..! ㅋㅋ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일지 여기 나오기 전까지도 잘 몰랐던 것 같다. 여기와서 유학하는 친구를 보고, 생각한것보다 더 거대한 독일어의 장벽을 보고 식겁하고, 당장 살 곳이나 플랜이 정해져있지 않아서 똥줄이 타는 경험을 해보니까 실감이 난다. 가장 막막한건 핸드폰 충전하려고 전화 걸면 안내방송을 하나도 못알아듣겠는 것이나, 뭐좀 물어보려고 전화하면 하나도 못알아듣겠는 독일어가 쏟아지는거 그런게 아니다. 방안에 앉아서, 온갖 대학교 프로그램의 정보를 앞에 띄워놓고, 도대체 내가 원하는것은 무엇인가? 라고 혼자 생각해 봤을 때 아주 광활하고 거대한 빈 칸이 앞에 있는 듯한 이 기분. 이게 진짜 무섭고 두렵다.

그래도 오늘 아침엔 처음으로 독일어 학원에 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국은 여전히 헬조선이라 간간히 소식을 들려주는 친구 후배들은 돌아오지 말란다. 지옥으로 무사 귀환하는게 어쩌면 여기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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