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철학으로 본 지속가능한 건축의 미래
얼마 전, 질 들뢰즈의 철학 이론에 대한 글을 읽다가, 그의 사상 중 특히 '파라노이아(Paranoia)'와 '스키조프레니아(Schizophrenia)', 그리고 이를 설명하는 '트리(Tree)'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들이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와 건축의 모습에 절묘하게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단단하고 견고하며 예측 가능한 '나무' 같은 세상을 추구하는 '파라노이아'적 경향, 그리고 중심 없이 유동적으로 뻗어 나가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땅속줄기' 같은 '리좀'을 닮은 '스키조프레니아'적 속성.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과연 오늘날 우리의 건축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지속가능한 건축과 바이오필릭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는 건축가로서, 이 질문은 곧 내가 마주한 고민의 핵심이 되었다.
현재 우리 도시의 수많은 근린생활시설과 상업 건물들은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굳건히 서 있다. 한 번 지어지면 그 목적과 기능을 바꾸기 어려우며, 견고한 정체성에 강하게 고착된 양상을 보인다. 효율성과 기능성을 최우선으로, 획일적인 형태로 지어지는 이러한 건물들은 '파라노이아'적 사고가 건축 공간에 투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정된 '나무'형 건축은 시대의 급변 속에서 여러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미래의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운 오늘날, 단일 기능에 고정된 건축물은 용도 변경의 유연성이 부족하다. 이는 자칫 도시의 유기적인 변화에 걸림돌이 되어 공동체의 활력을 저해하고, 지역 간의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건물이 가진 물리적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그 유연성 부족으로 인해 더 이상 도시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는 한다.
이러한 고정성에 대한 반작용일까. 최근 도심 곳곳에서는 '리좀'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팝업스토어'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단 몇 주, 혹은 몇 달 만에 생겨났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스키조프레니아'적 속성으로, 고정된 중심 없이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나타나 새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공간은 유연하게 변모하며, 방문객에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하고, SNS를 통해 빠르게 확산하며 물리적 형태를 넘어선 이야깃거리를 생산한다. 이러한 특성은 분명 고정된 '나무' 건축의 대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땅속줄기'처럼 자유로운 팝업스토어에도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바로 지속가능성의 문제이다. 일시적 운영을 위해 빠르게 설치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막대한 폐기물은 환경오염의 심각한 원인이 된다. 값싼 패널이나 플라스틱, 가벽 등 단기적 사용만을 고려한 건축 자재의 사용은 일회성 소비문화를 부추기며 환경 부담을 가중시킨다. 짧은 수명 주기와 끊임없는 재건축·해체 과정은 결코 지속가능하다고 볼 수 없다. 스키조프레니아적 유동성은 가졌지만, 진정한 의미의 지속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공간의 유연함과 확장성을 '리좀'에서 배우되, 그 속에 진정한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심을 것인가.
결국 우리는 중요한 질문에 직면한다. 너무나 고착되어 변화에 둔감한 '파라노이아적 트리' 구조의 건축도, 환경적 부담이 큰 '스키조프레니아적 리좀' 방식의 팝업스토어도 완전한 해답이 아니다.
변화에 열려있으면서도 자원과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생명을 불어넣으며, 나아가 공동체의 활력을 증진시키는 '지속가능한 리좀'의 건축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재료의 순환, 모듈형 설계, 바이오필릭 디자인 등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고민을 바탕으로, '스키조프레니아적 리좀'의 유연함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환경적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지속가능한 건축이 나아가야 할 구체적인 방안들을 탐색해 보고자 한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도시를 위해, 건축의 다음 장을 함께 열어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