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일기 2 : 작가들이 말하는 소설쓰기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단골 질문일지도 모른다. "왜 소설을 써요?" 혹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뭐에요?". 책을 왜 읽느냐는 질문 자체에는 이미 시중에 답이 널려 있다. '재미있어서'라는 간단한 대답부터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어서', '깊은 주제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서', '시야가 넓어져서' 등의 대답들도 많다. 하지만 그렇다면 읽기만 하면 되는데 왜 우리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까? 브런치에 글을 연재 하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한 번씩 자신에게 질문을 해보았을 거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이 글을 쓰는 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늘은 그 의미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누군가는 그걸 '말'로서 표현하는데, 나의 경우는 '글'로 표현하는 걸 더 좋아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도 힘들고, 발표를 할 때도 대본이 없으면 버벅거린다. (면접이 제일 힘들다. 그냥 서면 면접으로 보면 안 될까요? 글쓰기는 자신 있는데.)
나는 또, 일기 쓰는 걸 좋아한다. 나의 감정에 대해서 적어내고, 나중에 읽어보는 그 행위가 나 자신을 알아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젠 일기만으로는 부족할 때가 있다. 누가 봐줬으면 좋겠는데, 또 아는 사람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 모순적인 마음 때문에 실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보다는 익명의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그 장소가 바로 브런치가 된다.
일기를 쓰면서 점점 에세이로 그 지평을 넓혀가게 된다. 사람들이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장르가 바로 에세이다. 글의 영감이나 소재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쓰면 에세이가 된다. 좋은 에세이, 팔리는 에세이는 아니더라도 괜찮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낸다는 것 자체에서 만족감이 오니까. 나 역시도 지금처럼 에세이를 쓰는 걸 좋아하는데, 쓰다보면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들이 그나마 정돈이 되는 거 같은 느낌을 받아서다. 지금도 되는 대로 술술 쓰고 있다.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손으로 쓰는 형태다. 글을 쓰는 시간 만큼 어쩌면, 내 머릿속이 가장 맑은 상태가 되는 게 아닐까. (이건 사람마다 다른 거 같다. 글을 쓸 때가 되면 머리가 엄청 복잡해지는 사람도 있으니까.)
요즘은 SOS를 치기 위해 에세이를 쓰게 된다. 나와 같은 사람을 찾기 위해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어디 없나요? 라고 외치기 위해서 글을 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 세계가 참을 수 없기에 숨구멍을 틔우기 위해서다. MBTI를 정말로 좋아한다. 상대가 INFP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부터 무한한 친밀감이 솟아오른다. 적어도, 저 사람은 나같이 생각할 거라는 어떠한 믿음. 내가 말하는 바를 잘 이해할 거야. 우린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이니까. 동일성이 소중하다. 나와 다른 세상이 판을 치는 곳에서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에세이를 쓴다.
에세이는 '내 중심'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나와 관련된 것,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다녀오던 여행. 그것들을 나와 비슷한 사람과 나누는 게 에세이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건 다르다. 소설을 쓰게 된다면 다양한 인물상이 나와야 하는데, 작가만큼은 그 인물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인물의 다양성에 고민하게 된다. 나와 닮은 인물만 나오는 소설은 정말 재미가 없어진다. 나와 닮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더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등장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마냥 적이면 안 된다. (참고로 내가 말하는 '소설'이란 문학적 소설을 가리킨다.) 사람은 모두가 입체적이다. 누구나 절대 악일 수는 없다. 각자만의 사연이 있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개연성이라는 게 인물에게 부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인물을 작가 스스로와 독자들이 납득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이 바로 소설이다.
소설 쓰기에 대해서 작가들이 말했던 한 마디들을 모아보았다.
각각의 윤고은들 이름을 불러주며 어느 하나도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꼭 붙들어주는 것 - 윤고은
글쓰기란 '나만의 것'을 '모두의 언어'로 바꾸는 것 - 김정선
글쓰기는 더 넓은 자기가 되는 일 - 황현산
소설이란 결국 작가의 생각을 넘어선, 활자화된 삶의 어떤 태도 - 정유정
소설 쓰기는 인물의 고통을 납득하는 과정 - 김연수
즉 글쓰기는 작가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 쓸수록 타인에게 공감이 되고, 궁금해진다.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마지막으로는 제목에 대해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 나는 글쓰기를 '해야 하는'이유가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이유라고 적었다. 이는 다른 사람이 하라고 강제성을 부여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가 마음 속에서 강제성이 스스로 끓어오르는 것을 말한다. 하기 싫은 마음이 드는데도 할 수밖에 없는 것. 그걸 글쓰기에 대한 '사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설가 중에는 대개 그런 사명을 지닌 사람이 많다. 김숨 작가가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도, 한강 작가가 광주시민운동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도 그 '사명감'에서 비롯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말을 한다. 물론 그들의 사명감은 '잊혀진 사람들, 사회적 소수자를 다시 조명'한다는 것에서 사회적인 의미가 있기에, 비유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사명의 결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출발지는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김숨과 한강 역시 습작 때부터 사회적인 사명을 지니진 않았을 거다. 글쓰기로부터 출발된 세심하고 예민한 감각과 넓어진 시야에서부터 비롯된 게 아닐까 감히 추측해본다. 즉 글을 쓰다보면 어떤 사회적인 의미의 사명이 다가올 수도 있다는 거다. 어쨌든 우리는 모두 '글을 써야한다'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브런치에, 블로그에, 혹은 나의 개인 메모장에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글쓰기의 단계가 있다고 스스로 믿는다. 처음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로 시작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앞에서 말했듯이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 나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글을 시작해서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다보면 시선은 점차 변한다. '나'가 아니라 '타인'에게로. 타인의 삶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하다가, 어떤 타인의 삶에 집중하게 되는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게 글쓰기의 최종적인 목적지지라 생각한다.
아직은 나도 '써야한다'라고 꽂히는 건 없다. (있다면 대작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 길을 가는 건 멀다. 그러니까 꾸준히 써야한다. 끝까지 쓰는 사람이 작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