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다 May 11. 2022

제주에서 쓸모없게 살아가기

제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보자


쓸모없음의 쓸모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여러분에게 누군가, 왜 글을 쓰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을 할 건가요?" 많은 답변이 나왔는데 대다수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칭송이었다. 예술은 인간의 발전에 많은 도움이 되고, 정신적인 충족이 되며, 타인을 이해하기 위한 혹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이런 질문이 간간히 나올 때마다 '쓸모없음의 쓸모'에 대해서 말하곤 했다. 스무 살 때 호기롭게 답했던 것에 반해, 지금은 '쓸모없음의 쓸모'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


어느새부터 실용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 같다는 생각. 그 생각이 가끔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미라클모닝'에 빠져 아침 7시에 일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 수면부족으로 컨디션이 안 좋아졌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같은 유튜브 영상을 보며 명상을 시도하다가도 허탈해졌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걸 따라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찬물 샤워를 한다고 성공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에도 나는 자기계발서를 즐겨본다. 성공한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정작 자기계발서가 말하는대로 행동하진 않는다. 모순적인 마음이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쓸모없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곧 무너져내릴 듯한 구름


삼달리 마을 기행


오늘의 제주는 맑았다. 오후 3시 전까지는 해 쨍쨍한 맑음인데, 그 이후부터는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보고서 나갈 준비를 했다. 베이컨 마늘 볶음밥으로 든든하게 먹고, 오랜만에 설거지도 바로 하고서 나갔다. 입고 나간 숏패딩을 벗을 만큼 온도가 포근했다. 제주에서는 이미 유채꽃이 만개했다. 꽃이 피어나기에 좋은 날씨였다. 머물고 있는 숙소는 성산과 표선 사이에 위치한 삼달리다. 삼달리 근처에는 관광지는 물론이고 맛집이나 카페 역시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있는 건 올레길 3코스의 행적을 지닌 동네라는 것. 오늘은 그 코스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어휘력이 많이 떨어진 걸 실감했다. 바다를 보며 생각나는 단어들이 "청량하다", "아름답다", "광활하다" 정도. 사실은 그저 "우와!"하는 감탄사만 내뱉으면서 걸었다. 본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시 한 구절 정도는 읊어주어야 하는데.


새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잔잔한 물결보다는 물보라가 이는 파도를 더 좋아한다는 것. 새하얀 백사장보다는 화강암이 모인 해변이 더 웅장하다는 것. 갈매기들은 나는 것보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걸 더 좋아한다는 것. 생각보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멍 때리는 걸 잘 한다는 것이었다. 도시에서 길을 걸을 땐 별에 별 생각을 한다. 그 카톡은 언제 답장하지, 밀린 공부는 언제 하지라는 걱정부터 갑자기 친구와 싸우면 어떡하지, 사실 그때 말 잘못한 건 아닐까, 하는 일어나지도 않은, 지나간 일에 대한 망상까지. 하지만 자연을 보고 있으면 어떤 생각도 잘 나지 않는다. 이렇게까지 내 머릿속이 맑았던 적이 있었나. 이 맑은 머리가 썩 달갑진 않았다.


오히려 제주에 와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싶었다. 앞으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하는 걱정.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하는 과거의 반성과 같은 것들. 아니면 번뜩 떠오르는 영감까지도. 사실 그런 생각을 하려고 제주도에 온 거 같은데, 정작 "와!"하고 감탄밖에 안 하고 있다니. 도시에서보다 더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삼달리에서 발견한 '새들의 세계'


쓸모없게 살아가는 방법


쓸모없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배우고 있다. 최근에 산 책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제니 오델 지음)이다. 


무엇을 위한 쓸모인가? 이 질문은 내가 자본주의적 논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곱씹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무엇을 낳는 생산성인가? 어떤 방식의,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내가 삶에서 가장 큰 행복과 충족감을 느낄 때는 모든 필멸의 존재에 따르는 희망과 고통, 슬픔과 더불어 살아 있음을 온전히 인식한 순간이었다. 이러한 순간에 목적론적 목표로서의 성공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제주도에서 '뽕 뽑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달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매일 여행을 가고, 동쪽과 서쪽을 모두 섭렵하며, 제주의 맛집과 카페를 모두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한 달을 부지런하게 다녀도 다 볼 수 없는 게 제주도다. 제주도는 넓고, 인터넷에 나오지 않은 숨겨진 풍경을 지니고 있으니까. 차로 빠르게 달릴 때보다 걷고서야 보이는 게 더 많은 섬이니까. 벌써부터 예감한다. 한 달이 지나고서도 난 계속 제주에 있고 싶겠구나. 제주에 대해 아직도 모르겠구나. 그렇기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도시에서 제주에 대한 꿈을 꾸겠구나. 


꿈을 꿀거라면 최대한 자세하게 꾸고 싶었다. 길가에 널브러진 귤껍질의 모양에 대해서, 바다의 잔물결과 파도의 물보라의 차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에 들리던 파도 소리에 대해서. 그리고 그 꿈에서는 오늘 본 풍경이 나올 거라 확신했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물밀려오듯 들어오는 경험을 했다. 감정이 차고 넘쳐서, 도저히 어찌 할 수 없는 것들. "어떡해!" 라면서 감탄사를 내뱉기만 하는 것들. 옆에서 그 감탄을 맞장구쳐주는 건 같이 "어떡해, 어떡해!"하면서 호들갑을 떨어주는 거다.


최대한 쓸모없이 지내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휴대폰이나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서 전하고자 하는 자극적인 이야기에서 멀어지는 것. 오로지 내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중하는 일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의 저자는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절반은 관심경제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실제 세계의 시공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라고 본문에서 나온다. 책에서는 이 시간을 '새들의 세계'라고 명하기도 한다. 새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날아가는 새의 풍경에 집중하는 사색의 시간이다. 


아쉽게도 오늘은 제대로 쓸모없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 휴대폰을 보았고, 일요 웹툰을 모두 정주행했으며, 밥을 먹으면서 '연애의 참견' 유튜브를 보면서 깔깔대고야 말았다. 심심하니까 사람들 인스타그램을 한 번씩 보게 된다. 쓸모 없는 하루를 위해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앞으로의 목표는 최대한 '쓸모없이' 살아가기가 될 거 같다. 

이전 09화 딱 일인분의 다정함만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